누구나 존경하는 농민운동가의 삶을 살다

이 사람 ㅣ 전남 보성 농민 문경식 의장

  • 입력 2019.09.29 18:00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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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식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는 어렵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역임하던 때를 꼽았다. 한승호 기자
문경식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는 어렵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역임하던 때를 꼽았다. 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전남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에서 나서 한 번도 주민등록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어. 군대도 안 갔고, 전농 의장할 때 서울 왔다 갔다 한 거 빼고는 타지에 적을 둔 적이 없어. 그야말로 토박이야.” 문경식씨는 대를 이어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전형적인 농민이고 농촌사람이다.

“10살 때부터 할머니 손잡고 농사일 배우러 다녔어.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지. 10식구가 한 집에 살았는데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그는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 7남매 중 넷째,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세분의 누님들과 형님 한 분이 있다. 형은 몸이 약해서 일을 시키지 않았다. 착하고 말 잘 듣는 둘째 아들 문경식은 어려서부터 집안일 도맡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는 건달농민이었어. 독자인데다 우리 아버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우신 거야. 서당이나 보내고. 그 땐 소로 쟁기질 하던 때잖아. 남들 다 하는 쟁기질을 우리 아버지는 할 줄 모르셨을 정도야.”

가장인 아버지가 집안을 건사하지 않으니 어머니가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간신히 살림을 이어가야 했고 유년의 문경식은 농사일을 하며 집안일을 도왔다. “겨울에 내가 나무를 안 하면 불 뗄 나무가 없었어.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하러 다녔지.” 집안 형편이 이러니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1년 있다가 재건중학교에 들어갔어.” 그 시절에는 지역마다 교육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재건학교라는 야간학교를 만들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낮에는 농사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고 했는데, 그나마도 중간 폐교되는 바람에 못 다녔어.”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 보니 공부를 계속할 엄두도 못 냈다. 재건학교가 중도에 폐교되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공부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위에 식구들이 외지로 나가면서 식구가 줄어들고, 열심히 일을 하니까 사는 거는 조금씩 나아졌어. 그래도 동생들 가르쳐야 하니까. 동생들은 중·고등학교 다 졸업시켰어.” 그는 열심히 하면 잘 살 거라는 희망을 갖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부지런한 덕에 소도 3~4마리 키우게 됐고 논농사도 남의 논 얻어서 규모를 늘렸다. “우리 논이 1,000평 있었고 남의 논 얻어서 4,000평 농사지었어. 그때는 타작하면 논에서 바로 논주인과 반씩 갈랐어. 도지가 5:5였거든. 그나마 타작하고 짓는 보리농사는 주인과 나누지 않고 내가 다 가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 그것도 서로 하려고 지주에게 닭 잡아 바치고 그랬어.”

이 뿐 아니었다. 봄가을로 누에를 쳐서 동생들 학비를 댔다. “누에는 봄가을로 하는데 누에 팔 때가 납부금 낼 때야. 누에농사는 수매 안할 때까지 했지.” 그가 얼마나 억척스레 일했는지 알 수 있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20대 때에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쟁기로 길을 들였다. “그 소로 일 엄청나게 했어. 1년에 백마지기(2만평)를 쟁기로 갈고 써레질을 했으니까. 모를 다 심고나면 소 발굽이 다 닳아져. 소도 발이 아프니까 모래땅은 안 가려고 해. 풀 있는데만 찾아가고.” 소 발굽이 다 닳을 정도로 일을 했으면 사람 발 역시 성할 리 없다. 장화도 변변치 않던 시절 맨발로도 일을 해야만 했다.

인생의 전환점, 크리스찬 아카데미

열심히 하면 잘 살 거라는 기대감을 잔뜩 품은 순박한 청년농민 문경식은 지역 선배들의 권유로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가게 됐다.

“교육을 받고 보니 우리가 너무 당하고 산 것을 알게 됐고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분노를 알게 됐어.” 일제 치하 그리고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억압과 불합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은 이러한 사회적 불의를 일깨워주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일 년이면 열흘씩 울력이라고 돈도 안 받고 일하고, 사방공사 한다고 사나흘 씩 산에 동원돼 나무 심고 그랬잖아. 밀가루 나눠주는 거나 좀 나눠 받고. 그런 것들이 부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이때부터 그는 지역의 선배 운동가들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했다. “밀주 만들고 나무해서 걸릴 일이 많던 시절인데 자기들 말 안 들으면 조사 나와서 입건하고 벌금 물리고 그러니까 관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맞서 싸웠어. 농협에서도 수매하면 강제로 출자금 떼고 비료 사도 떼고 그랬는데 출자 거부 하고, 울력 거부도 하고 그런 일을 해 나갔던 거지.”

면사무소 지소 농협 모두 농민들의 착취기구로 군림하던 시절 누구도 말 못하고 당하고만 있었지만 그와 농민운동가들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면사무소나 농협에서 큰 소리 치면 우리가 이겼어. 그때는 민원에 민감한 시기라 우리가 도나 중앙으로 일을 크게 키웠지. 당시 지역에서 문제가 생기면 군수가 교체되는 시절이라 우리 말을 안 들어 줄 수 없었어.”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보성군에서는 가톨릭농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 그는 교회를 다니던 시절이라 기독교농민회 만드는 데 참여했다. “정광훈, 배종렬 선배님들 만나서 전남기농을 만들기로 했어. 그리고 보성에서는 다니는 교회 목사님 하고 전도사와 상의해서 정광훈 선배 모셔서 공부도 하고. 기농의 기틀이 만들어졌는데 노풍 피해가 온 거야. 정부에서 새 품종 벼를 심으라고 권장했는데 흉년이 들었어. 보상투쟁도 하면서 싸움을 시작했지. 그런데 기농은 경험이 없어서 가농이 중심이 돼서 싸우게 됐어. 그 바람에 기농 하려던 사람들이 다 가농으로 가버려서 결국 기농은 만들지 못했지.”

이 싸움은 성과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피해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쌀을 나눠줬다. 작지만 농민들이 정부와 싸워서 얻은 성과였다. 이후 농민들은 농업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수세투쟁, 고추투쟁, 소몰이 투쟁 등 전국에서 봇물처럼 농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러한 투쟁은 농민운동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1989년 2.13농민대회로 수렴됐다. “이 투쟁의 승리 여파로 1990년 4월 24일 전농이 창립됐어.” 이후 그는 보성군농민회 조직에 나섰다. “보성군농민회 만든다고 했을 때 백남기 회장님이 반대했었거든. 보성군농민회는 전농 창립 다음해인 1991년에 조직됐고, 내가 2대 회장을 맡았지.”

지난 21일 광주광역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 고 백남기 농민 3주기 추모제에서 문경식 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지난 21일 광주광역시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 고 백남기 농민 3주기 추모제에서 문경식 의장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한-미 FTA 그리고 전농 의장

그의 호칭은 ‘의장님’이다. 2000년 전농 광주전남연맹 의장을 맡으면서부터 얻은 호칭이다. 도연맹 의장 2년 이어서 전농 부의장 2년, 의장을 4년 역임했다.

“도연맹 의장도 정광훈 의장님이 갑자기 청원해서 하게 됐어. 당시 굉장히 열심히 활동했어. 전농에서 하는 경제사업도 전남이 1등을 할 정도로.” 전농 광주전남연맹 의장을 마치고 그는 전농 부의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전농 부의장으로 전농의 경제 사업을 전담하는 역할도 맡게 됐다. 당시 전농의 시군농민회 20곳에서 농민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농민주유소는 지역에서 면세유 가격 인하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농민운동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느 날 강병기 전농 정책위원장 하고 젊은 사람들이 우리집에 찾아와서는 전농 의장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부의장 끝나고 전농 의장까지 하게 됐어.” 전농 의장에 취임한 때가 2004년이다. 2년 후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됐다. “한-미 FTA 문제가 터지니까 막막하더라고. 그때 앞장선 사람들이 영화인들이었어. 오란 소리도 안했는데 전농 점퍼 입고 무작정 영화인 집회에 갔어. 스크린쿼터 반대 농민들도 같이 할 테니 영화인도 농민들과 같이 한-미 FTA 반대 해달라고 농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전했어. 그렇게 해서 영화인들과 연대가 시작됐지.”

노무현정부는 2006년 한-미 FTA 현상을 개시하겠다고 발표한다. 미국은 한국 측에 한-미 FTA 협상에 앞서 4대 선결 조건을 요구했다. 4대 선결 조건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스크린쿼터 축소,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 강화, 약값 재평가제도 폐지 등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는 우리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와 직접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 비해 취약한 우리 영화산업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는 독소 조건이었기에 영화인들이 거리로 나서는 초유의 일이 발생하게 됐다. 영화인 중 송강호와 최민식은 특히 농민투쟁에도 함께해서 큰 힘을 주었다.

“송강호씨는 거창농민회 결의대회에 참석해서 행사가 끝날 때까지 함께하고 60여명 뒷풀이 하는데 밥값을 내주기도 했어. 최민식씨가 한-미 FTA 투쟁 참 열심히 했거든. 농민대회에 와서 농민들에게 큰절을 하기도 하고. 한번은 방송에 출연했는데 어디서 그렇게 투쟁하는 것을 배웠냐고 진행자가 물어보니 ‘전농 문경식 의장한테 배웠다’고 하더라고.” 이 말을 전하면서 크게 웃었다. 한-미 FTA 투쟁은 농민 투쟁 역사상 최초로 유명 영화인들과 연대했던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역을 가리지 않는 농민운동의 큰 연대를 문경식 의장이 이끌어낸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이때가 농민단체간의 연대도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다.

금강산에서 받은 생일상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로 남북관계가 급진전 되면서 전농의 통일운동이 구체화됐다. 2000년 10월 9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노동당 창건 행사에 전농 대표단이 초청됐다. 전농 대표단은 북측의 조선농업근로자동맹 간부들과 환담을 나누다 북에서 못자리 비닐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후 전농은 못자리 비닐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북에 못자리 비닐을 보내주면 모를 잘 키우게 되고, 일찍 심게 될 뿐 아니라 수확도 훨씬 많아진다고 해서 광주전남에서 광주MBC와 함께 모금 행사를 했어. 전농이 북에 보내는 비닐의 70%는 전남에서 맡았을 만큼 대성공을 거뒀지. ‘통일증권’이라고 5,000원 짜리 증서를 만들어서 나눠줬는데 호응이 아주 좋았어.” 그가 전농 광주전남연맹 의장 시절의 얘기다. 못자리 비닐 보내기 운동은 2001년에 시작해서 2005년까지 계속됐다.

2002년부터 전농은 통일쌀 보내기 운동을 시작했다. “통일쌀 모금운동은 많은 농민들이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 되, 두 되 씩 쌀을 모았어. 한 마을에 40kg짜리 4~5가마가 나왔어. 그렇게 걷어서 전국을 순회해 판문점까지 간 거야. 전체 200톤 중 170톤은 전남에서 걷었어.” 이렇게 모인 쌀은 인천항을 통해서 북으로 전달됐다. 통일쌀 보내기 운동은 경작운동으로 발전했다. 시군농민회에서 통일쌀 경작지를 마련하고 그 곳에서 농사를 지어 북에 보내자는 것이다. “통일쌀 경작지에서 지은 쌀은 직접 개성에 싣고 갔어. 1톤 트럭 10대에 쌀을 싣고 개성까지 가서 전달해 주고 왔어.” 농민들이 직접 차에 쌀을 싣고 북에 간 사례이다. 그가 도연맹 의장에서 전농 의장을 맡은 2000년 이후 이명박정권 출범 전까지는 이처럼 남북교류가 활성화 됐던 시기다.

전농의 통일운동 역시 활발했다. “내가 평양에 5번 가고 금강산은 13번, 개성은 5번 갔어. 역대 전농 의장 중에서 가장 많이 갔지. 2001년 광주전남연맹 의장 자격으로 정광훈 의장을 모시고 평양에 처음 갔어. 묘향산도 가고 평양에서 비행기 타고 백두산까지 가서 천지도 보고.” 당시에는 남북 간 민간교류도 다양했다. 그는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 금강산, 개성을 방문하게 됐다. “내 생일이 4월 초인데, 항상 그때가 되면 금강산에서 남북 간 행사가 열렸어. 2004년에 못자리 비닐 샘플 가져가서 전달식을 하려는데 금강산호텔 스카이라운지에 내 생일상을 거창하게 차려 놓은 거야. 큰 꽃다발도 있고, 가수들이 노래까지 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북측에서 문경식 의장의 생일상을 차려 축하해줬다. 이후에도 매년 금강산에서 생일상을 받았다고 한다.

문경식 의장은 농사지으며 후배들에게 버팀목이 돼 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문경식 의장은 농사지으며 후배들에게 버팀목이 돼 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승호 기자

“이제 후배들 버팀목이 돼야지”

“전농 의장하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야.” 그가 전농 의장을 하던 시기는 농민운동이 전환점을 맞는 시기이자 50년 만에 이뤄진 정권 교체로 사회가 급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미 FTA 투쟁, 홍콩투쟁, 홍덕표·전용철 열사 사건, 남북 통일대회, 못자리 비닐 보내기, 통일쌀 보내기, 광우병 사태 등 격변의 시기였어. 어렵고 가슴 아픈 일도 많았지만 동지들이 도와줘서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지.” 전농 의장 시절 한-미 FTA 저지 농민대회에서 경찰에 의해 대회에 참가한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덕표·전용철 열사 사망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고 경찰청장이 사표를 냈다.

“전농 의장을 마치고 좀 쉬려고 했는데 1년도 못 쉬게 하더라고. 민중당 전남도당 위원장 하라고 해서 직을 맡았고, 전남진보연대 대표도 하라고 해서 4년을 하고 올해부터는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가 됐어. 그의 농민운동의 긴 여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전농 의장을 끝으로 평회원으로 후배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생각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이제 뭘 하려는 생각은 없어. 농사짓고 후배들 버팀목 돼 주고. 그렇게 살려고.”

평생 농민이자 농민운동가로 살아온 문경식 의장에 대한 평은 아주 호의적이다. 성실한 사람, 예의바른 사람, 똑똑한 사람으로 꼽는다. 문경식 의장은 농민운동을 하면서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전농 의장으로 있으면서 사무실 귀퉁이 숙소 생활을 하면서 항상 책과 각종 자료를 쌓아놓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어느 활동가보다 농업문제에 해박했으며 현안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서 농사지으며 농민운동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바쁘다는 이유로 활동을 회피한 적이 없다. 지금도 전농에서는 문경식 의장을 농민운동가의 모범사례로 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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