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② 나룻배 시절이 더 좋았다

  • 입력 2019.09.2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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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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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의 본디 이름은 절영도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절영도’라는 섬 이름이 수도 없이 등장하고, 멀리는 <삼국사기> 열전편의 <김유신전>에도 올라있다. 그 섬은 예부터 말 기르는 곳으로 유명해서 일찍이 나라에서 관리하는 목장인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다. 그런 탓으로 그 조그만 섬이, 국가대사를 기록해 놓은 역사문헌에도 빈번하게 등장할 정도로 대접을 받아왔다.

이름의 유래가 재밌다. 그 섬에서 기르는 말은 워낙 준수한 명마여서, 일단 달음박질을 했다 하면 ‘그림자(影)’가 달리는 말을 따라잡지 못 하고 ‘끊어진다(絶)’ 하여, 섬 이름이 절영도(絶影島)가 되었다 한다. 과장을 버무린 옛 사람들의 작명의 지혜가 가히 찬탄할 만하다.

해방이전까지는 시민들이 이 섬을 ‘말 목장이 있던 섬’이라는 의미가 담긴 ‘목도’라고 칭했고, 국토를 강점했던 일제 역시 ‘마키노시마(牧島)’라 했다. 해방 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본래의 절영도에서 한 글자를 떼 내고 영도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영도다리’라고 칭하는 그 이름도 공식적으로는 ‘부산대교’다. 하지만 여기서는 시기에 관계없이 ‘영도’라 하고, 또한 ‘영도다리’라고 부를 것이다.

1930년대의 어느 여름날, 영도 선착장. 나룻배 출발할 시각이 다가오자 주민들이 저마다 남부여대하고 선창으로 몰려들었다.

-자, 자, 우선 짐부터 싣고, 사람들은 나중에 타라카이.

-거기 남자 분들, 아주마이가 이고 온 물미역 자루 좀 받아서 실어 주이소.

-여기 내 짐도 좀 받아 주이소.

-아이고 무거워라, 소라 고동에다 전복을 억수로 많이 땄네. 이 자루 좀 같이 드입시더.

영도 주민들이 바닷가에서 채취한 미역이나 톳 같은 해초를 비롯하여 담치, 해삼, 전복, 소라고동 같은 해산물을 담은 자루들이 잇달아 나룻배에 실렸다.

-짐 다 실었으면 다들 배에 올라 타이소!

선창에 대기하고 있던 주민들이 차례차례 배에 올랐다. 이윽고 밧줄이 풀리고 육지 쪽으로 방향을 잡은 나룻배가 통통통통,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도 사람들은 처음엔 노 젓는 목선으로 바다를 건너 육지 나들이를 했었다. 그러다 발동기를 장치한 동력선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일본 관리들이 직접 나룻배의 운영을 맡고 나섰다. 운영 주체가 바뀌었든 말았든 영도 주민들의 육지 나들이는 한결 수월해졌다. 주민들은 그날 그 날 바닷가에서 채취한 해산물들을 나룻배에 싣고 건너가서 도매시장에 팔았다. 물론 친지 방문 등 다른 일로 시내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도 있었고, 따로 볼일이 없는 아이들도 그저 배 타는 재미에 삼삼오오 몰려나와 나룻배에 오르기도 했다.

-자, 선가들 받겠심더. 다들 1전5리 씩 준비하이소!

-내는 5리가 모자라는데, 1전만 받그라!

-어린 아도 아이고, 택도 없는 소리 마이소. 5리 더 내야 합니더.

-어, 내 모자! 모자가 날아가삤다 아이가.

할머니와 선원이 선가(船價)를 깎아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다투는 사이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할아버지의 모자가 그만 날아가버렸다. 그때 남자 고등학생 하나가 윗옷을 대충 벗더니 풍덩 바다로 뛰어들었고, 잠깐 만에 할아버지의 모자를 건져 들고 배에 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쳤다. 영도 토박이 부성수 할아버지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룻배 시절이 더 좋았어요. 오히려 나중에 다리가 놓인 뒤에는 그마저 교통수단이 없어져버리니까 두 발로 걸어서 건너가야 하잖아요. 주민들한텐 더 불편해진 셈이죠. 그럼에도 다리를 놓겠다고 나선 것은, 일제가 영도를 대륙침략의 기지로 조성하려는 속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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