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영도다리① 2001년, 영도다리 난간에 서다

  • 입력 2019.09.22 18:26
  • 수정 2019.09.23 08:46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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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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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군 일등병 첫 휴가 때 처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엘 가봤다. 막내 외삼촌이 개금동인가 하는 동네에서 유리가게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부산의 이모저모를 상당한 수준으로(?) 꿰고 있었다.

내가 나서 자란 곳은 조선시대로 치면 전라우수영 소속의 작은 섬마을이었으므로, 경상좌수영의 본영이 있던 부산은 말만 같은 남해안이지 거리로 치면 이쪽 끝과 저쪽 끝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부터 부산에 대한 이모저모를 모를 수가 없었다.

내게 ‘부산’을 들려준 사람은 내 아버지를 비롯하여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그 시절 웬만한 유행가들 속에는 부산이 있었다. 부산에 가면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는 정거장이 있고, 거기엔 늘 슬픈 이별이 있었다. 피난살이가 고단한 나그네는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울었고, 경상도 아가씨가 그의 두 손목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잊지 못 할 판잣집이 있고, 이 내 몸이 장사치로 연명하는 국제시장도 있고, 그 중엔 용두산을 외쳐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아, 그리고…초생(승)달만 외로이 뜬 영도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이웃집 사는 동무 재갑이는 유행가로 말고, 제 아버지를 따라 진짜로 부산에 다녀왔다. 녀석은 영도다리를 보고 왔노라며 자랑을 했다.

“너 공중에 떠 있는 다리 못 봤제? 나는 봤그등.”

“비잉신. 다리가 다 공중에 떠 있제 땅에 붙어 있으면 그거이 다리냐?”

“그거이 아니고, 다리가 이렇게…평소에는 이렇게 자빠져 있다가…배가 지나가면 요렇게 뽈딱 일어나서….”

“자빠져 있다가 일어난다고? 아, 인자 알겄다. 그런 다리 우리 집에도 한나 있어. 사다리!”

“아이고, 이런 멍충이. 너랑 말 안해.”

“받아쓰기 20점 맞은 새끼가 누구보고 멍충이래.”

2001년 7월초에 영도다리 관련 취재를 위해 다시 부산에 갔다. 부산시 영도와 중구 남포동을 잇는 다리로서, 대형선박이 지나갈 때면 육중한 상판을 들어 올려 뱃길을 틔워주던, 우리나라 유일의 도개식 교량이 곧 철거될 운명에 처했다 하여 매스컴이 온통 떠들썩했었다(나중에 철거계획을 백지화하고 보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주변 상인들에 의하면 곧 철거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인지 일삼아 찾아오는 나이 든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했다. 왕복 4차선의 찻길로는 자동차들이 부단히 오가고, 양쪽 인도로는 영도 쪽을 향해, 혹은 반대 방향인 남포동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였다.

손때 묻은 다리난간에 누군가가 갈겨 쓴 “강현이와 혜림이는 사랑에 빠졌다네”라는 장난기 어린 낙서가 웃음을 자아내는가 했는데, 서너 뼘 옆에는 또 “모든 걸 용서한다. 성국아 돌아오너라”라는 절절한 글귀가 보이기도 했다. 영도다리가 여전히 시민 생활의 한복판에서 그들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도 남을 만한 풍경이다.

“일제가 부산 사람들의 교통편의를 위해서 다리를 놔 준 것으로 아는 시민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산업발전을 위해서? 그것도 턱없는 소리예요. 고놈들이 영도다리를 건설한 데에는 대단히 음흉한 계산이 숨어있었어요.”

영도 토박이로서 영도다리와 평생을 함께 해왔다는 향토사학자 부성수씨(1925년생)의 얘기다. 그의 증언을 바탕 삼아서, 우리 민족의 근세사와 영욕을 함께 해온 ‘영도다리 67년(1934~2001)’을 되짚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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