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주도형 수급정책, 왜 필요한가

뼈아픈 수급정책 실패 반면교사
정책 현실화·산지 신뢰도 회복
자치·혁신·참여 시대정신 실현

  • 입력 2019.09.22 18:00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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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올해 정부의 양파·마늘 수급대책은 우리나라 농정사에 기록될 만한 쓰디쓴 패착이었다. 양파 24만8,000톤과 마늘 8만3,000톤이라는 엄청난 공급과잉이 발생했음에도 정부의 조치는 얼기설기했다. 수 차례에 나눈 정부 격리물량은 시장가격을 유도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도 골든타임을 놓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파 폐기에 300억원, 마늘 수매에 5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수확이 끝날 때까지 폭락된 가격을 단 100원도 지지해내지 못한 것이다.

농민들이 골든타임 내 집중적인 격리 발표로 시장에 신호를 달라 간청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극적이고 기계적인 수급대책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갖은 비난 속에서도 지자체·농협·농민들에게 정부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강요했다. 마늘 수매의 경우 낮은 수매단가에 기준규격을 비현실적으로 엄격하게 잡음으로써 아직까지 계획물량이 다 수매되지 못하는 웃지못할 일도 벌어졌다.

정부의 농산물 수급정책 실패로 가격폭락이 이어지자 ‘산지폐기’라는 이름으로 밭을 갈아엎었다. 올해 초 전남 해남군 산이면의 배추밭에서 한 농민이 겨우내 정성껏 키운 배추를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다. 한승호 기자
정부의 농산물 수급정책 실패로 가격폭락이 이어지자 ‘산지폐기’라는 이름으로 밭을 갈아엎었다. 올해 초 전남 해남군 산이면의 배추밭에서 한 농민이 겨우내 정성껏 키운 배추를 트랙터로 갈아엎고 있다. 한승호 기자

요컨대 패착의 원인은 산지와의 소통 단절에 있다. 정부와 농민들이 손 맞잡고 결정한 ‘조생양파 2만1,000톤 폐기’가 올해 초 조생양파 가격을 지지해냈던 사실을 돌아보면, 이후 중만생양파와 마늘에서의 정부-농민 간 엇박자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본시 채소 수급대책에 농민들의 목소리가 충실히 반영된 적이 없긴 하지만, 가장 긴박했던 위기상황에서 정부의 일방적 수급정책은 그 한계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농산물 수급은 수많은 변수에 엮여있으며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접촉하는 것이 산지다. 실제로 정부의 관측이나 정책이 농민들의 비판을 거세게 받을수록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한 피해를 가장 크게 받는 것도 농민들이다. 최근 농민들이 본격적으로 채소 품목단체를 만들며 ‘농민 주도형 수급정책’을 호소하고 있는 게 그런 이유다.

농민 주도형 수급정책은 산지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반영해 정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정책 대상자의 관점에서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정책 논의가 이뤄질 수 있으며 농민들의 적극적인 역할도 담보할 수 있다. 김창수 전국마늘생산자협회장은 “폭락이 한두 해만 됐다면 수급정책을 정부가 주도해도 된다. 하지만 단편적인 정책이 계속되면서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농사짓지 못하고 매년 작목 고민과 눈치보기를 반복한다. 농민들이 정책에 참여해 정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도록 하고 농민들도 같이 맞춰 할 부분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도와 호응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장점이다. 정부 수급정책에 대한 산지의 신뢰도가 ‘0’에 수렴한다는 것은 현재 지역·품목 불문 공통된 여론이다. 김효수 전국배추생산자협회장은 “정부가 정책을 만들려면 반드시 대상자인 농민들과 함께해야 한다. 정부가 산지 상황을 속속들이 알 수 없지 않나. 지금 이뤄지는 정책엔 농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농민의 정책 참여는 민주주의 강화라는 시대의 기본원칙에 비춰봐도 합당하다. 곽길성 전국대파생산자협회 준비위원장은 “지금껏 농산물 수급정책은 쌀 등 일부 주요품목엔 정부-농민 소통의 개념이 있었는데 다양한 품목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농민 주도형 수급정책은 자치·혁신·참여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 변화의 흐름과도 연관돼 있다”고 강조했다.

농식품부는 고질적 채소 수급불안의 해결책으로 최근 재배면적 축소를 들고 나왔다. 하지만 대안 고민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면적축소 방침을 ‘하달’하면서 농민들과 극렬한 마찰을 빚고 있다. 정부가 원하는 면적축소 정책을 진행하더라도, 적절한 보상과 대안을 논의하고 농민들의 원활한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농민들과의 협의는 필수불가결하다. 농민들과 거리를 둔 채 이치와 시대에 역행하고 있는 농식품부의 수급정책이 여전히 농민들의 신뢰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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