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민의 자격 - 당신은 농민입니까?

  • 입력 2019.09.22 18:00
  • 기자명 권혁주(충남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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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충남 부여)
권혁주(충남 부여)

내동생 곱슬머리 개구쟁이 내동생 /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 엄마가 부를 때는 꿀돼지 / 아빠가 부를 때는 두꺼비 / 누나가 부를 때는 왕자님 / 랄라랄라랄라랄라 / 어떤 게 진짜인지 몰라몰라몰라

어린 시절 불렀던 노래가사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별명이 서너 개인 시절만큼 세상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 참으로 많고 다양해졌다. 바야흐로 정체성 혼란의 시기이다.

나는 충남 부여에서 딸기, 양상추, 감자 등을 키우며 먹고 산다.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짓는다. 나는 농민이고 농부이며 농업인이다. 또한 나는 농사꾼이고 생산자이며 사장님이다.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세상은 나를 일상적으로 농민이라 부르지만 관공서에서나 서류상으로는 농업인이라 하고, 애정하며 몸담고 있는 생협에서는 생산자 또는 농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자재 업체로부터는 사장님이라 불리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가끔 내가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귀농 20년차를 목전에 둔 경험치로 그때그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과 입에 달라붙지 않는 어색한 이름을 대며 나를 포장하는 것에 그럭저럭 익숙해져 버린 상황이다.

요즘 농민수당 조례제정 운동이 한창이다.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보상의 의미로 시작된 농민수당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을 넘어 이미 대세가 됐다. 진행과정에서 일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지만 농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가짓수만 많아지고 갈수록 줄어드는 농업예산 모두 모아서 농민들에게 1/n로 나눠주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고 하시던 주변 어르신들의 푸념이 현실화되고 있는 듯하다.

농민수당 시행 시 가장 쟁점이 되는 내용 중 하나는 ‘누가 농민인가’, 즉 농민에 대한 규정문제다. 이는 농민수당 뿐만 아니라 직불제 개편 등 향후 각종 농업정책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일이기 때문이다.

농업경제학, 농촌사회학, 법률적 관점 등으로 농민이 누구인가를 따져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자가 아닌 이상 그런 내용들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아직도 내 신분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늘 아쉬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내 입장에서 농민은 누구인가를 헤아려본다면 농사를 짓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각종 서류 직업란에 농업이라고 적는 사람, 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농민이라고 보증해주는 사람, 영화 ‘친구’의 대사처럼 누군가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고 물어오면 “우리 아부지 농사짓는 농민인데요”라고 자식이 답하면 그게 농민일 텐데 말이다.

누가 봐도 멀쩡한 다른 직업이 있는 사람이 버젓이 직불금을 받아챙기고, 농사 말고는 다른 일을 해본 적 없는 이웃동네 촌로는 본인 이름으로 농사짓는 땅이 없어 ‘농민 아님’ 통보를 받는 것은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법’과 ‘공정’이라는 말이 가장 큰 화두가 돼버린 요즘 세상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럴 바에는 현재 농민임을 증명하는 ‘농지원부’나 ‘농업경영체 등록확인서’ 같은 서류조각 말고 독일처럼 ‘농민자격증’ 제도를 만드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다. 농민의 자격에는 조건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들의 자부심을 세워주는 것이 바탕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근심걱정 조금이라도 덜고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귀농하는 도시사람들과도 어우러져 농업(지역)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자식들에게도 진심을 다해 농업을 권해줄 수 있는 이른바 지속가능한 농업의 기본 토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예전과 비교하면 농민투쟁의 빈도와 격함이 덜 해지기는 했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농업문제가 극대화되는 가을날에는 나락을 적재해 둔 군청 앞마당에서 농민들과 공무원·경찰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어려운 농민들의 심정을 다 이해한다면서 당신도 농민의 자식이고 심지어 스스로 농민이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치솟듯 분노하는 선배 농민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농민 행세하는 ‘가짜 농민’에게 ‘진짜 농민’이 화를 낸 것이니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겼었다.

농민이면 다 같은 농민이지 ‘진짜 농민’과 ‘가짜 농민’이 어디 있을까 반문하는 사람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농민인 척 행세하는 ‘가짜 농민’보다 마음을 다해 농업·농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그들로 인해 농업이 제 가치를 인정받는 새 세상이 앞당겨진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들이 ‘진짜 농민’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감히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농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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