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중소농으로 산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중소농으로 산다는 것
  • 한우준 기자
  • 승인 2019.09.2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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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⑥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늘 생글생글 웃는 유주영 이장님과 좀 많이 과묵한 남편 김기형씨는 꽤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관지미에서 유일하게 소득을 위한 복합영농을 하고 있는 이장님 부부는 비록 소량이지만 예년보다 훨씬 이른 추석 전까지 멜론을 실하게 키우는데 성공했습니다.
늘 생글생글 웃는 유주영 이장님과 좀 많이 과묵한 남편 김기형씨는 꽤 잘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고령농가가 대다수인 관지미에서 유일하게 소득을 위한 복합영농을 하고 있는 이장님 부부는 비록 소량이지만 예년보다 훨씬 이른 추석 전까지 멜론을 실하게 키우는데 성공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도시의 기준으로는 ‘중산층’, ‘서민’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력으로 소규모 농사를 짓는 ‘중소농’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본을 바탕으로 효율을 높인 대농·기업농, 혹은 수입농산물과 더 이상 경쟁하기 어려운 것이죠. 그러나 유엔식량농업기구(UN FAO)는 올해 초 발표한 ‘가족농 10년 결의안’에서, 기업과 자본을 통해 농업과 식량위기 문제에 접근했던 지난날의 방식이 옳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생산성과 효율을 추구하던 우리 농정도 지금 뒤늦게 중소농을 살려야 한다는 명목으로 직불제 개편 논의가 한창입니다. 중소가족농들은 왜 힘들어하고, 점점 사라지고 있을까요. 유주영(52) 이장님 댁에서 그 이유를 찾아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관지미의 많은 집들이 사라졌고,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고령농입니다. 이 가운데 이장님 댁은 유일하게 ‘가족농’의 형태로 마을에 남아 있는 가구입니다. 부모의 농사일을 함께하며 승계한 자식이 있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장님의 남편 김기형(54)씨는 대학 졸업 후 다시 농촌으로 돌아와 농사일과 농민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동문인 남편과 결혼하며 관지미에 들어오게 된 이장님 역시 시부모님 밑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지을까요. 우선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짓던 임차 포함 1만평 정도의 쌀농사가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쌀농사로 일가족이 생계를 이어나가던 시기는 이미 지나간지 오래죠. 그래서 모를 심고 나면 하우스 대여섯 동에서 본격적으로 수박농사가 시작됩니다. 수박을 거두고 나면 그 자리에 다시 멜론을 심습니다. 가을에 멜론을 거두고, 쌀을 수확하고 나면 그해 농사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 자급자족 용도로 심고, ‘잘 되면 남는 걸 조금 파는’ 고추, 참깨, 방울토마토 등이 있습니다.

농사일이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통에 바쁠 때는 온 가족이 매달려야 합니다. 여덟 번째 관지미 방문이었던 이날, 이장님 부부는 물론이고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치르고 있는 큰아들 성현(23)군까지 휴가를 내고 와서 이른 멜론 수확에 나섰습니다. 옆 동네 살며 여성농민운동을 함께하는 이장님의 절친한 친구 이해자씨도 도우러 왔죠.

일부는 작업을 위해 남겨둔 고추 하우스 한 동의 빈 공간에서 멜론을 담을 박스를 조립하고, 한편에선 다 자란 멜론을 수확해 날랐습니다. 안타깝게도 하우스의 나머지 공간에는 전염병이 와서 일그러진 고추와 방울토마토들이 애처롭게 매달려있네요.

참, 함께 작업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이장님 댁에는 시어머니 김숙자(80) 할머니와 몸이 불편해 혼자 다니기 어려운 둘째 아들 김성진(16)군도 있습니다. 이 다섯 명의 식구가 농사로 먹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중소가족농이죠.

할머니는 이미 여러 차례 마을회관을 배경으로 등장하셨지요. 사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할머니 역시 평생을 그래왔듯 부부와 함께 밭으로 나갔지만…. 일명 ‘농부병’이라고 하죠, 근골격계 질환이 심해져 무릎 수술을 받은 뒤로는 농사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원 가나마나 안 나아. 그래서 요샌 안 가. (밭에) 나가질 못하니 아주 심심해서 죽겄어. 지금은 그래도 겨우 풀이나 좀 매고 그러지.”

밭농사를 오래 전담한 여성농민들 대다수는 노년이 되면 그 정도가 크건 작건 관절로 인한 고통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사서 쓸 형편이 못 되니 농사일 대부분은 스스로 해야 하고, 막대한 양의 노동을 감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내다보니 몸 어딘가가 고장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애들은 사진 안 찍히려고 해. 자기 혼자 XX 떨면서 찍는 건 잘 찍어.” 이장님의 친구 이해자씨와 큰아들 김성현군도 와서 돕는데, 한두 번 일을 같이해 본 사이가 아닌 듯합니다.
“요즘 애들은 사진 안 찍히려고 해. 자기 혼자 XX 떨면서 찍는 건 잘 찍어.” 이장님의 친구 이해자씨와 큰아들 김성현군도 와서 돕는데, 한두 번 일을 같이해 본 사이가 아닌 듯합니다.

 

“원래 멜론은 한참 더 늦게 나는데, 일부러 공간을 만들어서 겨우 이만큼이나마 심은 거에요.”

올해 추석은 너무 빨랐죠. 저희 집안도 차례 상에 쓰려고 아직 다 익지도 않은 감들을 비싼 값 주고 모셔왔는데요. 일반적으로는 멜론도 사과나 배처럼 추석 대목(주로 선물용)을 노리는데 이번엔 너무 빨라서, 전체 1,000평 농사 중 1/10 정도만 추석 전에 낼 수 있었습니다. 멜론을 일찍 키우기에는 올해 기후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추석을 노린 주변 멜론 농가들이 품종을 바꿨다가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전부 농사를 망쳤다고 하네요. 이장님 댁은 그대로 길러 살아남았다는데, 이월면에서 멜론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우리 멜론 농사 엄청 오래 지었어. 처음에는 어떻게 키우는지 몰라 가지구, 심었는데 멜론이 얼마나 형편없던지, 이만했나, 언니? 이거보다도 작았어(4수도 되지 않는 과실을 들어 보이며). 거의 다. 거기다가 따는 시기를 몰라가지고, 나중에 보니까 배꼽이 다 갈라졌어. 그래서 이거 망했다 하고 사람들한테 다 돌렸는데. 몇 년이 지나도 계속 얘기를 들었어. 그 때 멜론 너무 맛있었다고.”

첫 해 한 박스도 팔지 못한 채 시작한 멜론 농사는 우여곡절 끝에 농사법을 터득하고 직거래 판로를 상당수 확보하면서 수박과 함께 이장님 댁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됐습니다. 값은 8kg 4수 한 박스에 3만원으로 나쁘지 않지만 직거래라야 가능한 가격입니다. 1+1은 2니까, 수박도 하고 멜론도 하면 수입이 그만큼 늘어나야 맞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사정을 들여다보면 우리 농촌의 현실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예전에는 수박을 하고나서 후작을 할 생각을 안했어. 근데 수박이 점점 가격이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이 돈이 되는 작물을 찾지. 그 때는 대부분 후작으로도 수박을 또 하거나, 단호박 같은 편한 농사를 했어. 근데 지금은 애호박도 하고 멜론도 많이 하고. 대파도 하고. 토마토도 하고. 그런 거 있잖아.”

마찬가지로 수박을 하는 친구 이해자씨가 옆에서 거듭니다.

“강도 높은 노동이 요구 되는 거.”

“그래. (수입이 적으니) 그런 거라도 따서 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물가는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그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몇십년째 계속되면서, 농민들이 자립 경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작 규모를 예전보다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땅은 한정돼 있고 또 비싸니, 그게 불가능하면 같은 면적에서 작기 수를 늘리기라도 해야겠죠.

“수박은 20년 전 가락시장에서 한 통에 1만3,000원 받으면 잘 나온 거였어. 근데 지금은, 20년이 지났는데 오히려 그 가격도 안 나와. 들어가는 인건비, 운반비 같은 비용은 훨씬 많이 올랐고.”

“우리는 겨울에는 쉬고 싶은 거지. 너무 힘들고 땅도 힘들어. 수박도 두 번하고 시금치도 두 번하고. 1년에 그렇게 하는 겨. 그런데 우리가 다년간 농사를 져보니, 땅이 다 잘하게 하진 않아. 쉴 때가 있어야 해. 하나에 집중해서 잘하는 게 훨씬 나은 거야.”

그나마 시댁이라는 ‘비빌 언덕’이 있어 어찌저찌 자리는 잡을 수 있었다고 돌아봅니다. 시아버지가 남긴 1만평의 쌀농사는 비록 그 규모는 작아도 항상 일정 금액의 수입을 보장하고 있는데. 이장님은 농촌에서 무슨 농사를 짓든 그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확실히 벼농사가 최고야. 벼는 굉장히 안정적인 수입원이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 논을 갖기가 너무 어려워. 이젠 벼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는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야 해. 지금 농민수당이나 공익형직불제 같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인 거지.”

모든 농사에서 쌀 직불금과 같은 소득안정장치가 없으면, 쌀 생산에 접근할 수 없는 소농의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우리 농업의 현실이라는 것이죠.

오랜 세월 우리 농촌을 몸소 겪은 부부는 농민운동에도 매우 열심인데, 군의원에도 당선됐었던 남편은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사무총장을 2년째 맡고 있고, 이장님은 올해 진천군여성농민회의 회장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김 사무총장님’이 되면서 하우스를 몇 동 줄이긴 했지만 여전히 농사일을 하면서 서울을 오가고,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을 농민운동에 바치는 그 열정과 체력에 경외감마저 드네요. 이 부부가 바라는, 할 수 있는 만큼만 농사짓고도 먹고 살만한 세상, 언젠가는 올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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