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5회] 깨어진 좌우합작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돌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9.22 18:00
  • 수정 2019.09.27 16:2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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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1920년대 중반에 민족해방세력은 수많은 파벌로 갈라져 분열을 거듭했다. 크게 나누어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였지만 그 안에서도 타협주의와 비타협주의, 통합파와 비통합파 등으로 분열되었고 크고 작은 단체들은 350여 개를 헤아렸다.

그 와중에 상해 임정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외교중심론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베이징에서 안창호, 원세훈 등이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으나 그 배경은 훨씬 복잡했다.

우선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자치를 내세우는 논리가 나타나자 그에 반대하는 비타협 세력이 생겨났고 사회주의 쪽에서도 민족협동전선론에 입각한 운동론이 등장하면서 두 세력 간에 이해가 맞아떨어진 점이다.

또한 일본 사회주의 쪽에서 불어온 영향, 즉 분열에서 통일로 가자는 방향전환론이 국내에도 바람을 일으켰다.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역시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서 좌우합작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정세와 조건이 어울려 19272월에 신간회가 창립된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가 작명했다는 신간회는 새롭게 돋아나는 가지라는 뜻이었다.

신간회 초대회장 이상재(왼쪽)와 신간회 조선공산당 대표 한위건
신간회 초대회장 이상재(왼쪽)와 신간회 조선공산당 대표 한위건

종로 YMCA강당에서 열린 창립식은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일제 경찰이 감시하는 가운데 열린 창립식에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현수막이 걸렸고 200여 명의 각계 지도자와 청중 1,000여 명이 몰렸다. 나라를 빼앗긴 후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단체가 결성된 것이었다.

신간회의 목표는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민족이 단합해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역량을 강화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뚜렷하게 민족의 해방을 내걸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정치적 각성과 단결 등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해방이었다.

그 구성원들을 보면 안재홍, 이상재, 신채호, 조만식, 허헌, 홍명희 등 당대의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공산당의 대표로는 한위건이 참여하였는데, 그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3.1항쟁 당시 탑골공원에서 학생대표로 선언문을 읽은 사람이기도 했는데 그는 당대의 공산주의 이론가였다. 당내 파벌로 치면 엠엘계에 속했는데 그는 일본 유학 시절과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에 여러 논쟁적인 문건을 작성하였다.

특히 중국공산당 내에서 그의 필명을 딴 철부노선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을 만큼 뛰어난 공산주의자였다. 실제로 조선인으로는 가장 고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공산당 하북성 서기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회장을 맡은 이상재가 조선일보 사장이었기 때문에 발기인 34명 중에 무려 12명이 조선일보 기자와 간부들이었다. 조선일보가 방씨 일가에게 넘어가기 전, 그러니까 민족언론이라고 할 수 있었던 잠시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이었다.

신간회 회원은 20세 이상의 남녀로 반드시 개인 자격으로 입회하도록 했다. 신간회는 창립 이후 불과 10개월 만에 전국에 100개의 지회와 2만여 명의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내용적으로 신간회의 중앙은 민족주의 진영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지역의 조직들은 사회주의 세력이 장악한 형태였다. 불법단체로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던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합법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대거 신간회에 개인 자격으로 가입을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분위기는 사회주의가 압도적이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일제는 왜 처음부터 신간회를 불법화하지 않고 세력이 커질 때까지 지켜보았던 것일까. 일제 경찰은 독립운동 세력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단일전선 안에 반드시 분열이 생길 것이라 예상했고 그것이 오히려 민족운동 역량을 약화시킬 것이라 판단했다. 또 단일 조직이 관리하기에 더 편하다는 계산도 있었다.

결국 그들의 예상대로 신간회는 차츰 우경화되었고 사회주의 계열에서 해소론이 불거져 나오면서 창립 5년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최초이자 최후의 좌우합작이 그렇게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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