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 김성칠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9

  • 입력 2008.06.28 09:37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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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벽 두 시가 넘어 밖에 나가 어슬렁거린다. 어제 해거름에 용석이와 삼밭골에 가서 마신 술 탓에 저녁도 굶은 채 잠들었다가 자정이 조금 넘어 깨고 말았다. 오래 뒤척거리다가 잔소리만 듣고 나는 집 앞 길에 나가 서성이다가 서재로 들어와 엎어놓은 책을 펼친다. 며칠 전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 김성칠 선생의 ‘역사 앞에서’이다.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김성칠 선생의 묘소에 표석을 세우겠다면서 묘소를 좀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난 직후였다.

아! 영천사람, 김성칠. 그 부탁의 말끝에 내 가슴은 부르르 떨렸다. ‘영천 사람, 김성칠’이란 말은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붙인 말이다. 그이는 1928년 대구고보 2학년 때,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을 복역하고 1932년, 동아일보 농촌구제책 논문 현상모집에 당선되어 규슈로 유학을 갔다 온 뒤 경성제대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우리의 역사책이 없었던 해방 공간에서 우리 글로 쓴 ‘조선 역사’를 저술하였으며, 6.25 동란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숨어 지내며 좌우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와중에 그 어느 쪽에도 서지 않고 그 당시 일들을 양심적 지식인으로써 써내려간 일기가 90년대 초, ‘역사 앞에서’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오게 한 자유주의자 김성칠. 그이는 피난지 부산에서 고향에 다니러 왔다가 괴한의 저격으로 작고한 이후 묘비 하나 없이 초라한 산야에 버려져 있다. 나는 그이를 오래 잊고 있었다는 자괴감에 다시 책을 꺼내 든 것이었다.

나는 그이가 1950년 9월16일에 쓴 일기를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이마를 짚는다.

“나는 대한민국에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다. 그의 해나가는 일이 일마다 올바르지 못한 것 같고 그의 되어가는 품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서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오려니 하고 예견하였었다. 그러므로 육군이라 써 붙인 찝차를 타고 마을길에 들지를 아니하였고 대한청년단에서 교양강좌를 맡아달라는 것을 병이라 핑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인민공화국에 대해선 각별한 향념(向念)을 품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내 인민공화국에 대한 기대는 몇 해 전 ‘민성(民聲)’지의 북조선 특집호 중에서 북조선 문화인 좌담회의 기사를 읽고 갑자기 식어졌다.”

나는 두 손바닥으로 세차게 얼굴을 문질렀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의 다른 것은 차치 하더라도 ‘나는 대한민국의 그리 충성된 백성은 아니었다’, 라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나는 불현듯 촛불문화재와 이 나라를 이끌고 가는 소수의 주체세력을 떠올리며 흠칫 어깨를 떨었다.

미국 소고기 수입을 위한 정부고시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강행되고 말았다. 이것을 반대하기 위해 촛불을 든 시민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세우며 이명박 정부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말았다. 수수보수들은 집단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준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촛불은 전혀 꺼질 기미가 없고 오히려 더욱 더 많은 촛불들을 결집해 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저 도저한 촛불들이 모여 흐르는 강물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충성된 백성’의 소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개 장사치에게도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거늘 하물며 정부라는 것이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비겁하고 삿된 욕심으로 유통시키려는 약아빠진 술수를 알아차렸다면 ‘대한민국의 충성된 백성’으로 어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야말로 ‘대한민국의 충성된 백성’이 아닌 것 같다. 6월 10일, 단 한번 대구에 나가 촛불을 든 것 이외에는 농사일을 핑계로 전혀 동참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필이면 농사철을 이용해 정부가 그딴 짓을 저질렀다고 소를 키우는 많은 친구들처럼 핑계를 대기에는 구차하여 낯부끄러워진다.

북으로 난 창을 통해 희붐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다. 길 건너 기환이 형님 밭에서 SS기 굉음이 새벽 공기를 뒤흔든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납처럼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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