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할머니, 오늘도 텃밭으로
홀로 남은 할머니, 오늘도 텃밭으로
  • 한우준 기자
  • 승인 2019.09.08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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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⑤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낡을 대로 낡은 보행보조기는 때론 훌륭한 농산물 운송수단이 된다. 지난달 6일 박순자 할머니가 텃밭에서 수확한 홍고추를 보행보조기에 싣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낡을 대로 낡은 보행보조기는 때론 훌륭한 농산물 운송수단이 된다. 지난달 6일 박순자 할머니가 텃밭에서 수확한 홍고추를 보행보조기에 싣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농촌에는 혼자 사시는 고령의 여성농민들이 많이 보입니다. 보통 할아버지들이 먼저 돌아가시니 홀로 남는 것이죠. 한평생 농사와 가사, 육아까지 맡느라 고생했지만 평생 딱히 은퇴랄 게 없다고 합니다. 관지미에서 혼자 삶을 꾸려가는 박순자(76) 할머니를 통해 고령 여성농민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박순자 할머니의 남편은 3년 전쯤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이제 50대가 된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는데, 외지로 나간 아들은 딱히 직업이 없습니다. 가끔씩 와서 남편이 남긴 논 600여 평을 돌보는데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다 합니다. 딸은 정신지체를 가진 채 태어나 여전히 할머니의 부양가족에 가깝습니다.

사실상 홀로 삶을 영위하게 된 할머니는 월 30만원이 채 되지 않는 기초노령연금과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아주 약간의 재산, 그리고 스스로 먹기 위해 꾸린 조그만 텃밭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그동안 농촌을 다니며 혼자 사시는 고령의 여성농민들을 많이 뵀지만, 관지미에선 할머니가 사실상 유일하게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할머니의 일과는 텃밭에서 시작해 텃밭으로 끝납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들깨, 무, 깻잎, 오이 등…. 200평도 채 되지 않는 밭에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채소와 곡식들이 철 따라 자랍니다. 예전에 농민운동에 대해 한창 배울 때,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여성농민들의 ‘농생태학’ 운동을 접할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농생태학에서 말하는, 여성농민들이 지켜온 전통적 농사현장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경운도 제대로 하지 못한 흙 위에 온갖 작물이 부대껴 자라는 이 밭은 생물다양성을 추구하는 ‘섞어짓기’식 텃밭농사의 훌륭한 예시입니다.

할머니는 여름이 가기 전 고추를 수확했고, 오늘 아침에는 점심 모임을 위해(그리고 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옥수수를 따고 밤고구마를 캐냈습니다. 다른 주민들은 할머니가 나이가 들었는데도 항상 해질 때까지 남아 밭을 돌본다며 혀를 찼습니다.

“아줌마 안 힘들어요? 이제 밭 줄여야지.”

“….”

“우리 마을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치자면 김홍덕씨 다음으로 해서 세 손가락 안에는 들지.”

관지미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으로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사람은 할머니와 농사일을 ‘만들어서 하는’ 이웃 김홍덕씨 정도 밖에 없다고 하는데, 사실 할머니의 나이도 슬슬 팔십을 바라보고 있어 이젠 이 정도로 다양한 작물을 유지하는 것이 힘에 부치긴 하답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12월에서 2월 사이 정도를 제외하면 쉴 틈이 없다는데, 그래도 여력이 닿는 한 밭을 돌보려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남편이 있거나 도와주는 자식이 있어 아직 논을 돌볼 수 있는 다른 분들과는 달리 여성농민으로 혼자 살아가는 할머니에겐 말 그대로 이 밭이 중요한 생계수단이자 삶의 이유인 것입니다.

관지미엔 종종 마을회관에서 함께 평일 점심을 해결하는 모임이 있습니다. 멤버는 ‘스윗가이’ 김상만·강창성 부부, ‘이장님 시어머니’ 김숙자 할머니, ‘최고령’ 신옥순 할머니, 그리고 박순자 할머니입니다. 인원이 적어 마을공동급식은 신청할 수 없어서 자체적으로 서로 도우며 식사도 해결하고 대화의 시간도 가지는 것이죠.

어르신들 가운데 70대 중반으로 그나마 나이가 가장 젊은 강창성·박순자 할머니가 함께 요리를 도맡고, 다른 분들은 식탁에 앉아 식재료 손질을 돕습니다. 고구마줄기의 껍질을 까던 신옥순 할머니는 박순자 할머니 텃밭의 새로운 소식을 듣자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고 합니다.

“내 오이 늙으면 줄게.”

“오이값 줄게 그럼.”

할머니들 사이의 짧고 명료한 대화에 웃음이 납니다. 사실 박순자 할머니는 요리 뿐만 아니라, 그 텃밭에서 수확하는 채소들로 이 식사 모임의 반찬 식재료를 전담하다시피 합니다. 이날 저도 점심을 함께했는데, 무 깍두기와 오이무침, 고구마줄기와 가지볶음, 호박잎, 꽈리고추멸치볶음, 깻잎장아찌 등 이 많은 반찬들의 재료 대부분이 할머니의 텃밭에서 나왔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평일 점심에 함께 모여 식사하는 주민들. 박순자 할머니(가운데)는 요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텃밭에서 나오는 채소로 식재료를 책임집니다.
평일 점심에 함께 모여 식사하는 주민들. 박순자 할머니(가운데)는 요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텃밭에서 나오는 채소로 식재료를 책임집니다.

 

오늘 딴 맛있는 옥수수까지 후식으로 먹고 슬슬 자리가 파하는 분위기. 할머니는 갑자기 오후에 가겠다던 병원을 가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그럼 댁에 계실 거냐고 여쭈니, 쭈뼛쭈뼛 새로운 얘기를 꺼내십니다.

“동전을 모은 게 있는디, 애들이 자꾸 빼 가 속상해서….”

안 그래도 병원을 가신다고 하면 오늘만이라도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제 차로 도와드리려 했기에, 뭔지 모를 이 새로운 일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지 여쭸습니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우물쭈물 말씀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할머니 때문에 정확한 사태 파악이 필요했습니다.

버리지 못한 온갖 폐기물과 잡동사니가 안팎에 가득한 집이었습니다. 할머니댁의 풍경에 놀란 것도 잠시, 할머니가 집안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힘겹게 꺼낸 손가방은 말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동전으로 꽉 찬 조그만 이 가방의 무게는 저조차 한손으로 거뜬히 들기 힘든 수준이었기 때문이었죠. 자식들이 허투루 쓸까봐 꽁꽁 숨기며 모은 이 동전들은 몇 년째 쌓인 건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심정을 읽은 저는, 3km 거리의 이월면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으로 곧장 할머니를 모셨습니다. 동전은 금액으로 24만원에 달했는데, 상당수는 100원짜리 동전이었죠. 비닐봉지와 보따리 천으로 이중 삼중 꽁꽁 묶인 동전뭉치 다섯 개를 풀어내느라 우체국 직원께서 애를 꽤 써야 했습니다.

버스가 자주 없어 불편하긴 해도, 읍이나 면에 있는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는 것 정도는 아직 혼자서 할 수 있다는 할머닙니다. 다른 분들이 할머니를 특이한 사람이라 하는 것도, 혼자 사는 할머니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용케 ‘큰 데’를 자주 나갔다 오시곤 해서였죠. 하지만 이 무거운 짐을 들고 나서는 건 아무리 그래도 어림없는 일이라, 마침 제가 병원 가시는 걸 도와드린다는 얘길 하니 고심 끝에 말을 꺼내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돕겠다며 나선 지금이 아니면 이것을 처리할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른다, 생각하셨겠죠.

비록 다른 할머니들처럼 남편이나 자식들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정말 필요한 일이라면 이장님은 물론이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다른 주민들이 계신데 할머니는 왜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요. 제가 만난 마을 주민들은 절대 도움 주길 마다하실 분들이 아니었는데 말예요.

“아유, 이런 걸 어떻게 말해….”

물론 여기에 자세히 쓸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남에게 신세지는 걸 꺼려하는 할머니의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 오늘 제가 먹은 할머니의 반찬들과 옥수수는 우체국을 다녀오느라 겨우 1L쯤 썼을 휘발유보다 훨씬 값진 가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할머니는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며 기어이 기름값을 1만원씩이나 주겠다고 연신 매달리는 바람에 잠시 ‘옥신각신’을 벌여야했습니다.

겨우 사양하고 작별 인사를 드리고 나니, 할머니의 삶은 지금껏 늘 이런 모습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농촌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역경을 견디면서도 늘 베풂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대접해달라 당당히 요구하지 못하고 억눌려 있었던 이 땅 여성농민들 가운데 하나였겠지요. 그럼에도 농사가 자신의 본분이라 믿으며 내일도 텃밭으로 향할 할머니께 마음 가득 존경을 보내며, 다음에 방문할 때도 도와드리리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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