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세력화, 멀고 힘든 고난의 길

  • 입력 2019.09.08 18:00
  • 수정 2019.09.16 16:50
  • 기자명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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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정치세력화는 무엇인가? 정치세력화의 방식은 무엇인가? 대중조직과 정치운동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수많은 고민과 쟁점을 여전히 안고 있는 이슈가 정치세력화이다. 여성농민에게 있어서 정치세력화란 여성의 대표성만이 아니라 농민의 대표성을 고려하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품에 안아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성농민운동에서 정치세력화는 진보적인 민중단체, 진보정당 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모두 살펴보기에는 시간과 지면의 한계, 개인 역량의 한계 상 제한적이고 부분적일지라도 여성농민운동사에 나타난 여성농민들의 정체세력화 운동에 국한해서 살펴봤다.

정치세력화를 향한 도전

정치란 인간이 자신의 생활에 대한 기획과 결정을 하는 행위이며, 자신이 추구하는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이다. 세력화라는 말은 권력을 배분하거나 또는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이다(이혜숙, 2017).

전통적으로 정치란 성 불평등이 가장 심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그 원인은 사회문화적인 원인과 제도적인 원인 두 측면 모두에 기인한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래 여성들의 정치참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농어촌 지역의 여성정치 대표성은 도시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여성의 정치참여에 대한 소극적인 의식이나 후보로 선출되기까지의 제도적 어려움은 여성들의 정치참여를 제한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여성농민들이 대거 정치세력화를 향해 나서게 된 것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조직적 결의와 더불어, 진보정당(구 민주노동당)의 여성후보 의무할당제 실시가 중요한 발판이 됐다. 아마도 두 가지 힘이 동시에 작용하지 못했다면 조직력이나 경제력, 정치적 세력이 약한 여성농민들이 정치세력화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밀고 나아가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정책선거에서 후보전술로

그 동안 여성농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결론부터 말하면 여성농민으로서 성 불평등을 해소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덜 적극적이고, 농민의 정치세력화라는 측면에서 보다 계급적인 성향이 강한 정치세력화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여성운동 영역에서 여성의 대표성, 참여의 권리 등 비교적 동등성 개념에서 출발하여, 유리천장을 깨고 여성이 정책결정권을 갖는 것에 집중해 할당제, 비례대표제, 중선거구제, 여성의무공천제, 남녀동수법, 여성전용선거구제, 남녀동반선출제 등 다양한 방식의 여성참여 방안을 둘러싼 투쟁을 통해 정치적 진출을 하는 것과 다른 양상이다.

여성농민의 경우 선거참여 방식에 대한 논쟁 없이 민주노동당의 정당방침으로 지방의원 20% 여성할당, 국회의원 30% 여성할당, 비례 홀수번 여성할당 등 제도적 진입장벽을 일거에 부수고 진출할 수 있는 진보정당의 정치적 성 불평등 해소 전략을 통해서 후보전술의 광범위한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여농의 정치세력화는 정책선거 홍보에서 후보전술로 진화했다. 1990년 전여농이 결성되고 이어서 1992년 대선이 실시될 당시 전여농은 선거투쟁을 강조하면서 ‘여성농민대개혁안’을 정책안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대선홍보 활동에 집중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1994년 4월 총선, 97년 대선, 98년 지방선거가 연이어 이어지는 선거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동안 98년 지방선거에서 농민회의 상당수가 민주당과 결합하여 광역·기초 의원에 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농민운동에서도 2~3명의 활동가가 개인적으로 민주당 비례 의원으로 진출했다.

이후 98년 대선으로 김대중정권이 시작되면서 신자유주의가 강화되고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2000년부터는 진보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제기됐고, 이러한 논의가 진보정당 논의로 급격히 확산된 것은 2003년부터이다.

2003년 이후부터 2010년까지는 진보정당에 대한 적극적 참여(후보전술)를 정치방침으로 결정하면서 조직원들의 헌신과 지지를 통해서 대대적인 후보참여와 그 성과로 2004년 총선에서 여성 국회의원 비례(제주 현애자),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102명의 후보 중 농민후보는 21명, 당선된 농민후보 11명 중 5명의 여성농민 후보가 당선되는 쾌거를 이룩했다(광역비례 전남-고송자, 전북-오은미, 경남-김미영, 제주-김혜자, 기초비례 합천-박현주).

전여농 출신 지방의원의 당선과 더불어 전여농에서는 2007년부터 여성농업인조례 제정운동을 실시하는 등 정책의 법적 제도적 기반 조성을 위한 실천활동을 가열차게 전개했다(전체적으로 여성의 정치참여는 2002년 여성의원 비율이 3.19%에서 2006년 13.7%로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고 이 과정은 민주노동당의 여성의원 할당제 및 비례 홀수배정의 역할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여성농민들의 기자회견 모습.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 여성농민들의 기자회견 모습.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책투쟁

1995년 전여농은 지방자치시대 여성농민 10대 과제를 제시하고 그 중에서도 복지관련 토론회를 7개 광역도(경남, 충남, 경기, 강원, 전남, 전북, 충북)에서 실시했다. 95년 지방자치시대 정책과제로 제시한 내용과 2004년 총선 공약으로 제시한 정책은 실제로 큰 차이가 없다. 그 이유는 여성농민이 요구하는 정책과제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거나 실현된 과제도 원점으로 환원됐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지방선거와 총선 등 선거단위별 정책 목표에 대한 고민이 적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시됐고 2010년 이후로는 통일농업, 식량주권 및 생태농업, 토종씨앗, 여성농업인 바우처, 농민수당 등 당면한 실천과제들이 추가되긴 했으나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이 제시됐다.

1995년 지방선거 정책과제 2004년 총선 정책과제
1.여성농민 관련 중앙정부부처, 지방자치단체 내 여성농민 전담부서 마련 1. 식량자급, 통일대비, 환경보존, 소득보장 농정방향과 체계 구축
2. 여성발전기본법 시행령에 여성농민 요구사항 반영 2. 여성농민 인력육성과 지위향상을 위해 법․제도를 개선하고 예산 확충
3. 여성농민을 위한 복지예산 확보  3. 안정적인 여성농민정책의 수립과 시행을 위한 행정체계 마련
4. 여성농민 대상 영농교육 확대와 사회교육 프로그램 확보  4. 여성농민의 농정참여 강화
5. 후계자 선정에서 여성농민 할당제 도입(30%)  5. 여성농민 경영능력 향상과 전문인력화를 위한 교육 및 지원 강화
6. 여성농민의 체형 및 우리나라의 농업환경에 맞는 농기계 개발과 보급  6. 협동조합 내 여성농민의 참여 확대
7. 농촌지역 유아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영유아보육법 개정  7. 여성농민 노동가치 실현을 위한 시책을 수립․시행
8. 농촌지역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농어촌교육특별법 제정  8. 여성농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여성농민을 위한 교육·문화시설 확충
9. 농촌지역 학교급식 운영방침 개선 9. 농촌보육환경 개선
  10. 농촌교육을 살리기 위한 대책 수립

정치세력화와 조직시스템의 변화

본격적으로 농민운동 진영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전개되기 시작한 2003년 여성농민운동 진영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직 내에 ‘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정치세력화를 둘러싼 조직 내의 의견의 차이로 인해 2004년 대의원총회에서는 단어 하나하나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특정 정당 관련 문구 및 진보정당 가입 의무화 규정 등을 둘러싼 논란은 뜨거웠고 마침내 전여농 대의원대회 사상 처음으로 안건에 대한 표결까지 하는 등 험난한 여정을 지나왔다.

이후 전여농은 정치세력화를 위한 방안으로는 정치위원회 설치(정치위원회는 도 단위에서는 여전히 구성이 되지 않거나 가동되지 않은 지역이 일부 있었음), 정치학교 실시, 후보선출, 당원확보, 실질적인 유세지원까지 직접 참여 방식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출마자들은 입당 기자회견을 했고, 후보전술이 본격화되면서 <여성농민후보 선출규정 및 소환탄핵에 관한 규정>을 새로이 만들었다.

전여농의 정치방침은 2004년보다 2006년이 되면서 훨씬 구체화됐다. 2006년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넘어서 여성농민 후보를 출마시켜 여성농민 정치세력화를 앞당기는 것을 직접적 방침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례 국회의원 현애자 의원이 당선되고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있었던 2004년 이후에는 당과 농민운동 세력이 함께하는 정책협의회를 만들어 지속적인 논의의 틀을 마련했고,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와도 정책적, 조직적 연계를 지속했다. 2006년은 지방선거에서 여성농민 후보들이 대거 확대되면서 여성농민후보자협의회를 만들고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와 연계를 강화했다.

이후 2007년 정책협의회에서는 여성농업인육성조례 제정을 첫 번째 과제로 이후 전 지역에서 여성농업인조례가 제정되는 실천 활동이 실시됐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 대해서 전여농 대의원대회 자료집에 실린 활동평가를 인용하면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조직적으로 결의하고 실천했던 지역을 볼 때 대체로 여성농민회 전체 활동력이 함께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조직 내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시·군 단위 정치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내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2010년 당내 부정선거 논란에 대한 책임으로 자진사퇴한 윤금순 당선자의 기자회견 모습.
2010년 당내 부정선거 논란에 대한 책임으로 자진사퇴한 윤금순 당선자의 기자회견 모습.

함께 또 따로, 멀고 험한 정치세력화의 길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았던 정치세력화는 2010년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2008년 총선에 대응하기 위해 2월 21일 민주노동당 쇄신과 발전을 모색하는 토론회에 이어, 3월 10일 농민선본(비대위원 윤금순)이 발족됐고, 이후 농정공약 발표 기자회견 등 본격적인 총선활동이 논의됐으나 농민후보는 강기갑 의원 1명을 사수하는데 그쳤고,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또한 낮아졌다.

전여농 의원단 협의회에서는 ‘전여농의 부족한 역량과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세력화를 결단해 지금까지 왔다고 전제하고, 왜 전여농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지, 여성농민운동이 필요한지 왜 여성농민 비례후보를 내는지 우리의 근거와 정당성을 풍부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성하면서 농업에 대한 여성주의적 고민도 심화돼야 한다’는 의견을 공유했다.

이후 2010년 지방선거 때 많은 후보들이 어려움을 딛고 과감히 선출직으로 정치세력화에 도전하는 자세를 보이는 등 여성농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지속됐다.

2010년은 전여농 20주년이고 지방선거가 치러진 해였다. 그 결과 6명의 여성농민후보가 당선됐다(광역선출 순창 오은미, 기초비례 나주 임연화, 정읍 박연희, 김제 김영미,  진주 김미영, 경산 박정애). 이후 2011년 진보진영의 진보대통합이 추진되고 그 결과 통합진보당이 결성됐다.

이후 통합진보당 농민정치사업단의 농민위원장을 맡은 윤금순(경북 성주)은 비례 1번으로 당선됐지만 당내 선거를 둘러싼 ‘부정선거’ 논란이 제기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전여농은 현애자 의원 이후 또 다른 비례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기회가 좌절됐다. 이후 전여농은 ‘당의 분열을 원치 않지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고, 제2의 정치세력화를 지역에서부터 실현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전여농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진보정당은 정의당과 민중연합당으로 분열하여 대중운동 내부 역시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정치세력화는 여성농민운동의 중요한 목표이고 과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멀고 험난한 길일지라도 여성농민운동은 그 길을 결코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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