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가을장마에 녹아내리는 애간장

  • 입력 2019.09.08 18:00
  • 기자명 심문희(전남 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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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심문희 전남 구례군 마산면

‘도대체 이놈의 비는 언제까지 내린다냐? 아무 씨잘떼기 없는 비가 하루 왼 종일 추적추적 내리기만 하고 있으니.’

베어놓은 참깨는 못 볼꼴을 보이고 있다. 가만히 서서 싹을 틔우고 각양각색의 곰팡이란 놈이 하나둘 피기 시작한다. 농사 시작하고 처음으로 재배한 참깨인데, 쉬워 보였는데, 작기도 길지 않게 보였는데….

하지만 참깨라는 놈은 완전 내 생각을 간파하고 있는 듯 ‘그래 너 한번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을까? ‘울고 싶어라’ 노래가 절로 터져 나온다.

참깨를 베어내고 무 씨앗을 넣을 때만 해도 ‘아싸 하늘이 내 일을 하나 덜어주는군’ 싶었다. 물을 따로 주지 않아도 적절히 때맞춰 내려주는 비로 인해 무 씨앗들이 앞 다퉈 싹을 틔워주고 구억배추, 부추 모종은 몸살도 없이 땅에 뿌리를 내리니 말이다. 허겁지겁 비 설거지를 하며 허옇게 떨어진 참깨 정도는 애교스럽게 봐 줄만 했었다.

그런데 이 비가 하루 이틀이 아니다. 가을장마란다. 처서에도 비가 오고 백로 무렵엔 태풍이 올 예정이란다.

어쩔 수 없이 기계의 힘을 빌린다. 고추건조기에 세워서 참깨 대를 말리기 시작했다. 500평이 넘는 참깨를 그냥 둘 수 없어 썩는 것을 면한 고추를 꺼내고 참깨를 말린다. 아마 몇십 번을 반복해야 할 일이다. 볕만 잘 나면 안 해도 될 일이다.

조상님들이 이 무렵의 날씨를 두고 하신 ‘처서에 비가 오면 천석을 감하고 백로에 비가 오면 백석을 감한다’는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일곱 근의 땀방울을 다 바친 나락의 모가지가 썩어 들어가는 걸 보며, 말리지 못해 싹이 나고 썩어 들어가는 고추, 참깨를 보며 얼마나 애가 탔을까 싶다.

그럭저럭 가뭄은 저수지를 만들고 수로를 정비하며 이겨내고 있는데 이제 보니 속수무책 내리는 비는 여전히 절반의 농사는 하늘이 하는 일이라는 걸 상기시켜 준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기 싫어 자식들에게 호미자루가 아닌 볼펜대를 쥐어주던 부모들의 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이제야 가슴깊이 이해가 되니 이놈의 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이른 추석에 비까지 겹치니 농민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농산물값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뉴스는 이제 일상이 돼버렸으니 도대체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 싶은 고민에 빠져든다. 평수를 늘려야 하나?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지금 하는 일만해도 넘치기 그지없지만 이 빗속에 머릿속은 하얘지고 죄 없는 애간장만 녹아나고 있으니 씁쓸하기만 하다. 이 와중에 ‘월세 보내주세요’ 하는 아이들의 문자가 온다. 30여년 농사지어도 땅 한 평 없는 이유가 이런 것일까?

날이 밝으면 떨어놓은 참깨를 볶아 깨소금 만들고 오랜만에 방앗간이나 가봐야겠다. 하우스 한편 이것저것 심어진 채소들 넣어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 더해 박박 비벼 먹어야겠다. 그 속에 근심 걱정 다 버무려서 먹어버려야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지 않았나. 다시 한 번 호미 들고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봐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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