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당포⑥ 전당포 창구에 비친 갑과 을

  • 입력 2019.09.08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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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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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현 씨가 안양시에서 ‘성우사’라는 전당포를 개업한 지 반 년여가 지났을 무렵의 어느 날, 한 주부가 아이를 업고 전당포를 찾아왔다. 등에 업힌 아이의 울음소리가 유난스러웠다. 여인이 한 손으로는 포대기를 추켜 아이를 어르면서, 다른 손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여성용 손목시계를 꺼내 창구로 들이밀었다. 여인의 목소리가 매우 작고 희미했다.

-이거 맡길 테니까 얼마가 됐든 좀 주시면….

시계를 받아들었던 윤석현이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아주 잠깐 만에 판정을 내렸다.

-아이고 이거, 태엽 감는 손잡이도 저절로 빠지고…너무 낡아서 잡아드릴 수 없네요.

여인이 힘없이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처음엔 등에 업힌 아이의 울음소리가 좀 컸기 때문에 거기 신경 쓰느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시계를 되받아 들고 막 돌아서는 여인의 표정을 설핏 눈에 담고 나서 윤석현은 아차, 했다.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했거든요. 막 보내놓고 생각해보니, 틀림없이 배가 고파서, 기운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마침 맡겼던 물품을 찾으러 온 다음 손님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그 일을 처리하고 나서는, 서랍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쥐고 달려 내려갔지요. 우리 전당포 앞이 버스정류장인데, 그 블록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두세 바퀴를 돌면서 아기 업은 아줌마를 찾으러 뛰어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어요. 그 뒤로도 문득문득 그 여자 분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때 윤석현은 그 여인의 표정에서 뭐랄까, 허기와 낙담, 혹은 삶에 지친 맹렬한 피곤기 같은 것을 읽었던 듯하다. 중국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그런 ‘허삼관들’이, 서울의 적십자 혈액원 앞에서, 생계를 위해 피 뽑을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일을 겪고서 며칠이 지났는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창구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우리 집이 서울인데, 안양에 와서 일을 보다가 그만 지갑을 잃어버렸어. 서울 올라갈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자, 이거라도 맡길 테니까….

-아니, 할머니, 이 추운 날씨에 두루마기를 벗으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지 마시고 도로 입으세요. 차비는 그냥 드릴 테니까 나중에 안양 나올 기회 있으면 그때 갚으세요.

한사코 두루마기라도 맡기겠다느니, 괜찮으니까 차비를 그냥 가져가라느니 한참 티격태격을 하다가, 그 할머니는 윤석현이 건넨 지폐 몇 장을 쥐고서 계단을 내려갔다.

일주일 쯤 뒤에 그 할머니가 전당포를 다시 찾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아들도 오고 며느리도 오고 딸도 함께 왔다.

“고마워서 인사를 하러 왔다고 자식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왔더라고요. 과일바구니에다, 당시에 가장 고급으로 쳐주던 청자 담배에다, 음료박스에다, 약국에서 산 드링크까지 바리바리 들고서요. 뿐만 아니라 그 할머니의 아들이 봉투를 내미는데 열어보니까, 빌려준 차비의 수십 배나 되는 액수였어요.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는데도 억지로 떠맡기고 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분들이 주고 간 선물 꾸러미와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든 봉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까, 내가 매몰차게 돌려세웠던 그 아기 업은 주부 생각이 자꾸 나서 편치 않더라고요.”

전당포 창구에 비친 1970년대 초의 세상 모습이 그러하였다.

전당포 사업은 신용카드가 발급되고, 현금서비스제도가 생기면서 급속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IMF 사태 그 무렵엔 길거리에서도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했잖아요. 갚는 것이야 나중 일이고, 카드만 넣으면 현금이 나오는데 누가 뭣 하러 전당포에 찾아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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