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당포⑤ 이틀 만에 두 달 이자를 내라니…

  • 입력 2019.09.0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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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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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을 하고나서 두어 달이 지나자 ‘삼원사’ 전당포에 제법 손님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주인은 전당포의 운영에 관한 전권을 윤석현에게 맡기고는 며칠 만에 한 번씩만 들렀기 때문에, 그가 온전히 주인노릇을 하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무얼 도와드릴까요?

-갑자기 친척이 상을 당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어서…여기 이 라디오 좀 잡힙시다.

-어디, 소리는 제대로 나는지 봅시다.

-소리야 항상 낭랑하게 잘 나오지. 거봐요, 틀자마자 하춘화 노래 나오는 거. ‘짝을 지어 놀던 임은 어디로 떠났기에 외로이 서서…’ 아이고, 당숙 돌아가시고 우리 숙모님 이제 짝 잃은 물새 한 마리가 돼버렸으니 외로워서 어찌 살까 모르겠네. 2,000원 줄 수 있어요?

-예, 2,000원 드릴 테니까, 6개월 안에 찾아가야 합니다.

안양에서의 개업초기에 윤석현은 전당포 일이 즐거워서 콧노래가 절로 나더라고 했다.

그러면 고객이 물건을 맡기고 돌아갈 때마다 “6개월 안에 찾아가라”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6개월이 지나도록 안 찾아가면 어떻게 될까? 아니 전당포의 대출 이율은 얼마나 됐을까?

“일제강점기의 전당포 주인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당업을 하면서 월이율 5부(5%)를 기준으로 삼았어요. 그런데 액수에 따라 달랐지요. 지금(2001년)의 예를 들면, 1만 원 이하의 소액이면 6부를 받고, 1만 원이 넘는 액수부터 10만 원까지는 5부를 받고, 10만 원이 넘으면 4부를 받는 식으로…. 그걸 우리가 물려받은 거예요.”

옛 시절 사채를 쓰는 경우에도 ‘5부이자’는 고리채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런데 일본인 주인 밑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람들이 일제가 물러간 뒤에 전당포를 차리면서, 이자 계산법까지도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인 업자들이 조선인들을 수탈하던, 매우 악질적인 수법까지도 물려받았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맡기고 3만원을 대출받았다면 당연히 5부 이율로 계산해서 한 달에 1,500원만 이자로 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전당포 주인이 1만 원 짜리 전당표 석 장을 따로따로 끊어줘요. 그럼 1만원씩 6부이자로 3번 빌려간 셈이 되어서 1,800원이 되잖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뭘 잘 모르기도 하고 또 급전을 빌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들 당했지요.”

또 한 가지, 전당포의 모든 이자는 월 단위로 계산을 했다. 거기에 함정이라면 함정이 있었다. 가령 8월 1일에 돈을 빌려서 8월 31일에 갚는 경우, 한 달 치의 이자만 내면 된다. 그런데 8월 31일에 돈을 빌렸다가 바로 다음 날인 9월 1일에 갚으러 가면 이틀밖에 안 됐는데도 두 달 치(8월분과 9월분)의 이자를 요구한다.

물론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사정 때문에 전당포를 찾은 경우라면 그런저런 날짜 계산을 할 겨를이 없었겠으나,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는 경우에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가 매우 ‘억울한 이자’를 부담해야 했다.

전당포에서 기한으로 정해놓은 6개월이 지나도록 물품을 찾아가지 않는 비율이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묻자, 윤석현 씨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10%내외라고 했다, 맡긴 물건을 찾아가지 못 한 그 10% 안에는 매우 아픈 사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한이 지난 그런 물품들은 또 어떻게 처리를 했을까?

“전당포마다 돌아다니면서 그런 물건만 수집해서 장사를 하는 중간 상인 아주머니들이 따로 있었어요. 다 그렇게들 벌어먹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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