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농지 소유해 싼값에 임대해야”

이 사람 ㅣ 두물머리 지키는 팔당 유기농민 최요왕씨

  • 입력 2019.08.25 18:20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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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김대중정부 시절,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유기농업을 권장하며 친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했다. 그 시절 경기도 양평군 팔당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팔당 상수원 유기농운동본부를 만들었다. 팔당 인근은 한강 상류지역이자 상수도 취수장이 있어 물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농사도 유기농으로 짓자는 의미다. 한강물을 상수원으로 사용하는 서울시에서 지원하고 농협도 힘을 보탰다.

팔당 지역은 서울과 가까워 오래 전부터 근교농업이 발달했고 시설채소가 주로 재배됐다. 관행으로 짓던 농약·비료 농사가 정부의 친환경농업육성 정책에 힘입어 이 지역 농업이 친환경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팔당 상수원 유기농운동본부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팔당생명살림영농조합법인을 만들었다. 활동이 왕성할 때에는 회원이 80여 농가까지 있었고 한해 매출은 60억원에 이르렀다.

상수원 보호를 위해 민관이 힘을 합친 결과 경기도에서 최대 규모의 유기농업단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나 유기농업에 철퇴가 내려졌다. 유기농업이 관행농업보다 상수원을 더 오염시킨다면서 팔당 인근 농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 배경엔 이명박정부의 ‘대운하사업’이 있었다.

이명박정부가 출범하면서 대운하사업에 불이 붙었다. 이미 육로를 중심으로 물류체계가 완성돼 있었으나 이명박정부는 4대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운하사업은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를 계기로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이름을 바꿔 속도를 냈다.

4대강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거대한 토건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4대강사업이 시작되자 주변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직격탄을 맞게 됐다. 특히 하천부지를 임차한 농민들은 강제로 밀려났다. 4대강 정비사업은 곳곳에서 농민들과 맞붙었다. 그 중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오래 싸워온 곳이 팔당 지역 농민들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두물머리 농민’들이다.

최요왕씨가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으로 인해 농지를 빼앗기고 이전했던 지난날과 농사를 짓기 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 등을 담담하게 설명하면서도 밝게 웃음 짓고 있다.
최요왕씨가 이명박정부의 4대강사업으로 인해 농지를 빼앗기고 이전했던 지난날과 농사를 짓기 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 등을 담담하게 설명하면서도 밝게 웃음 짓고 있다.

두물머리 농민

지명인 양수리를 우리말로 푼 두물머리, 그곳에서 이명박정부에 맞서 4대강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농민 최요왕씨를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어요. 환경 관련 회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환경운동연합 활동도 했어요. 졸업할 때부터 농사를 짓고 싶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했는데 아내 직장이 서울이라 출퇴근이 가능한 곳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어요.”

최씨는 졸업 후 11년 만인 2004년 당시 환경농업단체연합회에서 일하는 학교 선배 최동근 사무총장의 소개로 팔당에 터를 잡았다. “김병수 선배님 댁에서 농사를 배우게 됐어요. 김병수 선배는 당시 팔당생명살림영농조합법인에서 활동하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거기서 1년 반 정도 농사일을 도우면서 배웠어요.”

김병수씨는 팔당 지역에서 농민운동과 지역운동을 해 왔다. 당시 그의 농장은 귀농자 인큐베이팅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씨처럼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김씨 농장에서 농사일을 도우면서 농민이 되는 법을 익혔다.

“김병수 선배 집에서 지내는 동안 두물머리 하천부지를 얻게 됐어요. 100평 하우스 6동이 있는 800평 땅이었죠. 이미 유기농 인증이 있는 땅이라 인증 째 넘겨받아서 얼갈이, 케일, 오이, 양상추 등 여러 가지 채소를 심었어요. 내 농사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2009년에 4대강이 터진 거예요. 농사를 조금씩 알게 되고 배울 만 할 때였는데….”

막무가내로 진행한 4대강사업

이명박 대통령은 대운하사업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운하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았다. 집권세력들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온힘으로 밀어 붙였다. 2008년 광우병에 걸린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게 되면서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다. 광우병 쇠고기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대운하사업 반대’, ‘민주주의 회복’ 등으로 전선이 확대됐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과 대운하사업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운하사업은 4대강사업으로 이름표를 바꿔 달고 부활했다. 강바닥을 파고 보를 건설하고 하천부지는 모두 친수공원을 만든다는 구실로 농민들을 쫒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엠비(MB)가 그렇게 강하게 밀어 붙일 줄 몰랐어요.” 초기에는 농민들이 반대하면 절충해서 농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강 건너가 경기도 광주인데 거기 하천부지가 더 커요. 여기보다 농가 수도 많고. 광주에서 먼저 대책위를 꾸려가지고 우릴 찾아왔어요. 대책위를 같이 하자고. 그래서 부랴부랴 영농조합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렸어요.”

농민들은 이 때만 해도 농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싸움이 시작됐는데 광주가 먼저 접더라고요. 광주시장이 나서서 대체부지 만들어 준다니까 싸움을 정리한 거죠.” 이제 남은 곳은 남양주시 송촌리와 두물머리였다. 긴 싸움이 이어지다보니 하나씩 무너져갔다. 송촌리도 넘어가고 두물머리도 11농가만 끝까지 싸웠다. “측량을 못하게 하고, 공사를 막고. 그럼 농민들 왕창 잡아갔다가 벌금도 물리고…. 그렇게 싸웠어요.”

질긴 투쟁 속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태풍 곤파스가 지나간 거예요. 여기가 완전히 난리 났어요. 하우스가 싹 날아갔으니까요. 두물머리도 하우스 여러 개가 날아가는 피해가 생기니까 그 이후 더 싸우지 못하고 손을 놔 버리더라고요.” 행정이 강제집행으로 하우스를 철거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태풍으로 하우스가 날아갔으니 다시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당근을 내놨어요. 낮은 이자로 농지구입자금을 지원하고 시설자금 보조금 비율을 50%에서 80%로 늘려주겠다고.” 끝까지 남은 두물머리 11명의 농민들은 경기도가 제시한 대책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하여간 엄청 싸웠어요. 긴 싸움에 지친 사람들이 그만 하자고 해서 결국 7명이 대토를 구해 나가고 4명만 남게 됐죠.” 끝까지 남았던 4명도 2년을 버티다 결국 정리를 했다.

빚을 얻어 땅을 사다

두물머리에서 나온 농민들은 인근 농지를 구입해 다시 농사를 지었다. 땅값이 비싸 수억 원대의 빚을 떠안게 됐다. “우리 4농가는 2년 후에 같은 조건으로 나왔는데, 먼저 나온 분들 중에는 거치기간 3년이 지나면서 대출금 상환이 어려워 땅을 다 날리고 막노동 나가는 분도 있어요.”

경기도 지역에서는 빚으로 땅을 사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농산물 값이 형편없다보니 농사를 지어서 큰돈을 벌기는커녕 생산비만 건져도 다행인 세상이기 때문이다. 재산 없이 빚만 얻어 농사를 시작하는 농민들은 이자에 원금에 농사짓는데 들어가는 비용, 여기에 생활비까지 얹으면 힘겨울 수밖에 없다.

“두물머리에서 나와 가까이에 땅을 샀어요. 1,139평을 평당 47만원에 샀으니 5억3,000만원 빚이 생겼고 또 여기 터를 닦는데 4,000만원을 더 얻었어요. 거의 6억 가까이 빚을 낸 거죠.” 최씨는 1,000여 평 농사를 짓기 위해 6억원의 빚이 생겼다. 농사를 지어서 과연 이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정부가 4대강사업을 한다고 하천부지에서 사용료만 내고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을 내쫓은 결과,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거나 빚더미 농사를 짓고 있다. “이동필 장관 시절 조태희 장관 정책보좌관이 농민들 딱한 사정을 헤아려 거치기간을 3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데 애써 줬어요. 그나마 한 숨 돌릴 수 있게 된 거죠.”

최씨는 2013년 가을부터 새로 마련한 터전에서 농사를 다시 시작했다. “5월에 땅을 사고 가을부터 딸기 농사를 시작했어요. 두물머리에서는 딸기 농사 힘들다고 안 지었는데, 여기 나와서는 땅값 갚는 게 급하니까 돈 되는 농사를 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그 때가 딸기체험이 막 시작하던 때라 딸기 밖에 길이 없었어요.” 새로 산 땅 1,000여 평과 임대한 900평 땅으로 시작한 농사는 먹고 사는 일 보다 땅값에 대한 이자를 갚는 게 더 우선 순위였다. 심는 농사 말고도 체험농장을 병행해 부수입을 올려야 했다.

“처음에는 딸기 3동을 했는데 지금은 주변에서 딸기를 많이 해서 2동으로 줄이고 과채류, 엽채류 등을 연작이 되지 않게 순서를 정해 재배하고 있어요. 하우스 옆에 900평을 얻어서 양파·마늘 같은 채소를 노지에서 재배해 학교급식에도 보내요.” 하우스 3동, 노지 900평에 쉴 틈 없이 돌려짓기 농사를 하고 체험장도 운영하지만 소득은 충분치 않다.

“조수입으로 보면 약 3,500만원에서 4,000만원 정도예요. 이 중 3~40%가 체험 수입이죠. 그런데 매년 갚아야 하는 이자가 1,000만원 정도예요. 연말에 빚내서 이자 갚고 일 년 내내 농사지어서 겨우 빚 갚고 그렇게 굴러가고 있어요.” 농민들 대부분 그렇듯 최씨 역시 빚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빚이 더 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여길 정도다.

“농지가 적으니까 처음에는 체험농장 중심으로 하려고 했어요. 딸기철에는 딸기 체험하고, 하우스 방울토마토, 노지 고구마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서 체험농장을 운영하려고 했는데 혼자서는 감당을 못하겠더라고요. 시설도 갖춰야 하고 인력도 필요하고.”

그래서인지 6차산업 육성 정책을 들을 때마다 ‘징그럽다’고 말했다. 말로는 뻔지르르한 6차산업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시설과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춰야만 가능한 것이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시설과 기반을 갖춰 놓는다고 해서 잘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한때 6차산업을 농업의 탈출구인 것처럼 홍보하고 육성정책을 폈지만 일반 농민들에게 6차산업은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두물머리 안에도 일곱 농가가 체험장 만들고 카페형 농장이라고 그럴 듯하게 지어놓고, 베드재배 시설도 하는데, 소비는 점점 줄고 경쟁은 치열해지잖아요. 과연 투자한 비용을 회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요. 언제까지 투자만 할 건지 답답하죠.” 정부 지원정책으로 우후죽순 체험농장이 늘어나고 농장마다 막대한 시설투자를 하고 있다. 최씨는 그러다보니 농사체험이 왜곡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요즘 체험농장은 시설을 자꾸 고급화하고 있어요. 그런 농장들 가보면 흙을 밟을 수 없고 농작물은 흙에서 크지 않고 공중에서 자라고 있거든요. 체험을 위한 농사가 아니라 실제 내 농사 속에서 체험이 이뤄져야 본래의 교육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딸기를 베드에서 재배하면 수확량이 2~3배 더 나온다고 하잖아요. 그래도 저는 흙에다 딸기 심어요. 언젠가는 베드 딸기보다 흙에서 키운 딸기를 찾는 사람들이 분명히 늘어날 거예요. 지금도 가끔 체험 문의 전화를 하면서 ‘토경이냐’고 확인하고 체험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집사람 덕에 삽니다”

최씨가 이렇게 팔당에서 유기농업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인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집사람이 간호사예요. 집안 살림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니 제가 이렇게 농사지으며 살 수 있는 거죠.” 최씨는 귀농을 결심하면서도 부부가 같이 농사를 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는 계속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서울 근교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두물머리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06년부터 제가 새벽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어요. 집사람 출근시켜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직장이 구로였어요. 아침마다 강변역까지 태워다 줬어요. 5년 전부터는 안암동으로 발령이 나서 태릉역까지 태워다 주고 있어요. 한결 가까워진 거죠.” 최씨는 아내가 아니면 집안을 꾸려갈 수가 없다고 한다. 농사만으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살림을 원만하게 꾸려가기란 불가능한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다.

“집사람이 고생 무지했어요. 지하철역까지 태워다 주지만 거기서 또 지하철 타고 출근하고. 퇴근은 그 먼 거리를 대중교통만으로 와야 하구요. 여기에 ‘양수리역’이 생겨서 만세를 불렀다니까요. 집사람 퇴근이 조금 수월해졌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요.” 최씨는 미안한 마음에 출근을 도와 아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쓰고 있다.

“요즘 농지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어요. 하천부지처럼 정부가 농지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싼값에 농민들에게 임대를 하면 좋겠어요. 10년 전에 선배 농민들이 그랬어요. 땅값이 평당 10만원 넘으면 농사 못 짓는다고. 그런데 지금 땅값이 너무 올라서 농민들이 땅을 사서 농사지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팔당 지역 하천부지는 그대로 농사짓게 뒀어야 해요. 이런 국유지는 농사용으로 더 넓혀야 하는데….”

최씨는 4대강사업을 하면서 그나마 정부가 가지고 있던 농지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농민들은 점점 더 농지에서 밀려나고 있다. 농지의 상황은 해방 후 농지개혁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이야기가 과장된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농사짓던 두물머리 땅은 그대로 방치돼 있어요. 공원이라고 대충 꾸며놓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 그대로 있어요.” 땅 없는 농민들이 수두룩한데 멀쩡한 유기농지가 4대강사업으로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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