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당포④ 뒷문으로 들어가는 금융기관

  • 입력 2019.08.25 18:0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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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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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전당포에 전화가 걸려 와서 주인이 받았더니 한 취객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아저씨, 내 시계를 거기다 맡겨놨는데, 가서 보고 대답 좀 해줘요. 지금 몇 시예요?”하고 묻더라는…그런 우스개가 유행했을 정도로 60~70년대에 서민들이 전당포에 갖고 온 물품 중에는 손목시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시절에 전당포에서 일했던 윤석현 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하다. 가락지(반지)가 그 다음쯤 되었다.

하지만 시계나 가락지가 ‘비교적’ 많았다는 얘기고,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거의 모든 물품들이 전당포 창고에 줄줄이 들어와 쌓였다.

“월남전(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부터 품목이 매우 다양하고 고급스러워졌어요. 전엔 구경하기 힘들던 녹음기도 전당물로 등장하고, 스피커가 양쪽에 달린 ‘나무통 라디오’에다 야외전축, 그리고 선풍기도 단골품목이 되었지요. 1960년대 말에 본격적으로 시판되었던 금성텔레비전은 장식용 문까지 달려 있어서 부피가 엄청 컸잖아요. 어느 날엔 아버지와 아들이 그 금성텔레비전을 리어카에 싣고 와서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 오더라니까요.”

서울 세운상가 근방에 있던 전당포에서 전당업의 ㄱ부터 ㅎ까지를 대충 학습한 윤석현은 몇 달 뒤인 1971년 가을에는 근무지를 안양으로 옮겼다. 주인이 서울의 점포를 조카에게 맡기고서, 당시 경기도 안양읍내의 삼원극장 옆에다 점포 하나를 새로 차린 것이다. 이때부터 윤석현은 신장개업한 ‘삼원전당포’의 책임 점원이 되었다.

개업 첫날, 제사상에 도야지 머리 올려놓고 고사를 지낸 다음, 윤석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 해 주인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장님, 전당포 간판은 큰길에서 한눈에 바라다보이도록 창문에 제대로 잘 붙여 놨는데, 정작 들어오는 입구는 우중충한 뒷골목에 있으니, 손님들이 제대로 찾아오기나 하겠어요?

그러자 주인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너도 언젠가 독립해서 네 점포를 갖게 될 테니 잘 들어둬라. 전당포의 첫째가는 입지조건은우선 건물이 튼튼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도둑이 범접할 궁리를 못 하지. 다음으로는 드나드는 출입구가 가급적 후미진 뒷골목 쪽으로 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삼원전당포는 아주 명당에다 터를 잡은 거다. 왜 그러냐고? 너도 일이년쯤 지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런데 두 달도 안 지나서 아, 그렇구나, 이해가 되더라고요. 대개 서민들이 푼돈이 아쉬워서 전당포에 찾아오잖아요. 꼭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도 남들의 시선을 극도로 의식합니다. 가만 지켜보면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골목을 뱅뱅 돌다가 들어와요.”

고가의 카메라나 비싼 시계를 맡기러 오는 사람은 그래도 눈치를 덜 살피는 편이었다. 하지만 가령 부인이 병원에 가야하는데 당장 치료비가 없어서 장롱에 모셔두었던 양복을 꺼내들고 오는 경우라면 전당포 입구에서 쭈뼛거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미한 골목 쪽을 출입구로 삼고 ‘전당포’라는 표시도 건물 안쪽 벽에다 작게 붙여놓은 것은 손님을 위한 배려였다.

고사 상을 막 물리고 났는데 중년 부인이 찾아왔다. 주인이, 첫 손님 받은 것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다른 일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이 시계 얼마나 쳐줄 수 있는지….

-얼마가 필요하세요?

-천오백원이 있어야 하는데 고급 시계가 아니라서….

-허허허, 주민등록증부터 주세요. 제가 눈 딱 감고 천오백원 드릴 테니까 6개월 안에 꼭 찾아가야 합니다.

바야흐로 윤석현의 ‘전당포 인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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