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지?”
“젊은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지?”
  • 한우준 기자
  • 승인 2019.08.2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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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④

[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신옥순(92) 할머니는 고령에도 자식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줄 생각에 농사를 놓지 못하고, 자식들은 말리면서도 어머니를 찾습니다. 지난 17일 주말을 맞아 관지미를 찾은 자식들과 그 며느리들입니다. 왼쪽부터 셋째아들 신의재(61)씨, 둘째며느리 김화숙(65)씨, 신옥순 할머니, 첫째며느리 금하연(64)씨, 맏아들 신경재(70)씨.
신옥순(92) 할머니는 고령에도 자식들에게 먹거리를 나눠줄 생각에 농사를 놓지 못하고, 자식들은 말리면서도 어머니를 찾습니다. 지난 17일 주말을 맞아 관지미를 찾은 자식들과 그 며느리들입니다. 왼쪽부터 셋째아들 신의재(61)씨, 둘째며느리 김화숙(65)씨, 신옥순 할머니, 첫째며느리 금하연(64)씨, 맏아들 신경재(70)씨.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른들은 제 예상보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많이 이해하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이제 갓 서른이 넘은 기자에게 “그 나이에 결혼은 안 해?”라고 물으면서도 굳이 “요즘은 이런 질문 안한다는데”하고 덧붙인다던가 하는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그 생각들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젊은 사람들도 어르신들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번엔 마을의 최고령 어른을 만나 지난날 농촌의 삶은 어땠는지 배워보고자 했습니다.

이장님네 옆집에 사는 신옥순(92) 할머니는 마을 내에 생존해 계시는 유일한 90대 주민이자, 최고령의 어른입니다. 소녀가 겨우 막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라고 해야 할까요, 십대 중반의 나이에 관지미로 시집을 왔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기억을 비교적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산 증인과도 같은 어른입니다. 우리 시대 농촌의 삶은 과연 어떻게 흘러왔을까요.

할머니가 당시 그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된 배경엔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배어있습니다. 때는 1943년, 미국을 상대로 감당할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한 일제는 스스로 몰락의 운명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군국주의의 광기를 발산하던 일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식민 지배를 하던 땅에서 갖가지 전쟁범죄를 벌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건, 역시 일본군 성노예 강제동원이겠죠. 당시 마을에 나타나는 일본군 트럭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와서)저기다 차 놓고, 그러니까 그 때 시절에 안 붙들려가려면, 결혼한 사람은 안 끌려간다고 하니까 아무나하고 한겨. 차에 막 실어간다고 하니까 부모들이 얼른 사람 구해서, 어디 누가 있다고, 친정 조카가 있다고 하면 막 9일 만에 결혼하고. 아무것도 없이 결혼했으니 고생 엄청 했지.”

그 때 농촌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식량도 모자라 사람까지, 심지어 미성년자까지 끌고 가기 시작했던 그 때, 가난한 농촌의 여성들은 일제의 손쉬운 목표물 중 하나였습니다. 결혼한 여자는 보통 끌고 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유일한 대책은 바로 남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생존이 걸린 일에 나이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으니, 바로 신옥순 할머니가 16살에 관지미로 시집을 오게 된 이유입니다.

그 인생의 방향에 스스로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던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를 겨우 넘기고, 큰 고초를 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집살이를 맞았을 소녀의 마음이 쉽게 상상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맞게 된 해방, 한숨을 돌리고 부부가 7년 만에 아이를 가졌더니, 이번에는 북한군의 남침으로 이 땅에서 역대 최악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1.4후퇴 때 백곡저수지(현 진천읍 건송리) 위쪽으로 들어가서 숨어 있었지. 진천에서 거기가 제일 산골이야. 아이고, 고생이 말도 못했어. 피난민들이, 일가친척이란 사람은 다 와가지구. 이 알아? 모르지? 이는 어찌 그리 많은지….”

“전쟁 끝나고 나서는 그래도 좀, 평탄하셨어요?”

그러나 전쟁이 끝나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수탈도 전쟁의 공포도 사라졌지만, 신옥순 할머니는 1970년대에 들어서서도 농촌에는 아주 지독한 ‘보릿고개’가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젊은 기자 양반은 그게 뭔지도 모르지?”

9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들은 아마 저처럼 ‘먹을 식량이 모자란 계절’ 정도로 배워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시 농촌에서는 쌀을 수확한 자리에 보리를 심었는데, 늦봄이 끝나 이 보리가 수확되기 전에 쌀이 떨어지곤 했기에 ‘보릿고개’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어려움을 겪던 전쟁 직후의 우리나라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는데(그래서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을 ‘베이비붐 세대’라 표현하죠), 농사는 여전히 인력으로 지었고 비료를 주지도 않을 때라 쌀 생산량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설명을 조금 덧붙일까요. 이 기근 때문에 당시 박정희정권은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않는 날인 ‘무미일(無米日)’을 만드는 등 쌀 소비를 제한하는 동시에 밀가루 소비를 촉진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다수확 품종 ‘통일벼’를 개발해 농민들에게 강요에 가깝게 파종을 권하고 나서야 보릿고개는 사라지게 됩니다.

“얘(큰아들) 학교 다닐 때 아침하고 저녁만 먹었으니까.”

“감자, 고구마로 연명했죠. 쌀 찧는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쌀은 팔아서 돈 쓰고, 거기 남아 있는 싸래기로 죽을 해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할머니는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크게 편찮으신 곳 없이 매우 정정하시지만, 다만 귀가 잘 들리시지 않아서 오랜 시간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힘들었는데요. 그래서 관지미와 연을 맺기 시작한 이후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다 저번 마을 회의 때 큰아들이 매 주말마다 어머니를 찾아온다는 말을 듣고, 아드님을 통해 이야기를 정리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했지요.

“우리가 잘하는 게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고생을 많이 하셔서, 우리가 보답을 하는 거에요.”

효도하는 남편들 덕에 시어머니와 함께 김장에 들어갈 식재료를 손질하는 며느리들. 조심스레 심정을 물었으나 시어머니 앞이어선지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효도하는 남편들 덕에 시어머니와 함께 김장에 들어갈 식재료를 손질하는 며느리들. 조심스레 심정을 물었으나 시어머니 앞이어선지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힘겹게 농사지으며 자식 넷을 키워 낸 할머니는 길러주신 은혜를 갚고자 여전히 고향을 찾는 자식들 덕에 여전히 농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올해 93세일 남편 고 신용달 옹은 4년 전 돌아가셨지만, 노부부가 짓던 5,000평 남짓 되는 논을 큰아들 신경재(70)씨가 주말마다 와서 그대로 돌보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주말은 놀랍게도 텃밭에 배추를 심는다며(9월로 연기하기로 했지만) 세 아들 부부가 전부 관지미에 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할머니 본인으로서는 ‘복’이라 표현할 만한 흔치 않은 경우이긴 합니다. 자식들이 이토록 정성을 다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라는 의미죠.

“그 때는 심지어 (규모가) 저 정도도 안됐죠. 남의 농사도 지어가면서 엄청 고생을 하셨죠. 겨우 먹고 살고 그렇게 저희들을 키우신 거죠. 아버지 말년에 지은 저 5,000평은 저희 자랄 때를 생각하면 사실 엄청 큰 거에요. 나중에는 소 한 마리를 들여서, 일년에 송아지 한 마리가 나오니 그거 팔아서 동생들 등록금 내고.”

“지금은 얼마나 편해. 예전엔 여물을 끓여서 줬지. 그것도 모를 걸?”

소가 생긴 뒤 아들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매일 소를 먹이는 게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너무 어려웠던 살림에 큰아들은 공부를 시키지 못하고 제대 후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훌륭한 주물 기술자인 그는 젊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서 은퇴 후에도 계약직으로 일을 하며 주말마다 관지미에 와 할머니의 농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다른 동생들은 대학을 보낼 수 있었는데, 둘째는 교장선생님으로 은퇴했고 셋째는 사업을 한다고 자랑을 하시네요.

“옛날엔 농사만 지어서, 열 식구면 열 식구가 다 땅만 보고 살았죠. 지금 먹고 살려고 5,000평을 짓는다하면 (소득이) 아파트 경비 서는 것보다도 못해요. 그래도 (농사는) 어머니가 평생 하시던 일이고, 우리 자식들은 이제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걸 내가 농사 안 지으면 니들 전부 중국산 먹는다 이거야. 본인이 잡수시려고 농사짓겠어요. 자식들 주려고 하는 거지. 콩도 있고 고추도 있고. 배추도 심어서 김장도 하고….”

이제 그 큰아들도 벌써 일흔 살 노인이 됐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싫었던 농사일이었지만 결국 농촌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곧 ‘진짜’ 은퇴를 하고 나면 관지미로 내려와 할머니와 함께 소소히 농사지으며 살 예정이라네요. 그러던 차에 관지미가 산업단지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처지가 되긴 했지만요.

할머니는 뭔가를 설명할 때마다 ‘그게 뭔지 모르지?’ 하는 질문을 말끝마다 붙이셨는데, 말 그대로 할머니의 이야기 중 제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청춘의 시기보다, 장성한 자식들 뒷바라지를 받으며 부부가 나름 편하게 농사지은 자신의 60·70대, 그리고 장수를 이어가는 지금이 가장 복 받은 시기라고 하실 정도니, 지난 세월들은 얼마나 인고의 시간이었을까요. 어쩌면 영원히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제 머릿속에 남을지 모를, 또 다른 농촌의 역사를 배울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할머니의 복을 나눠 받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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