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2] 아, 원산 총파업! (2)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2] 아, 원산 총파업! (2)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8.25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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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32회>

에밀졸라의 유명한 소설 ‘제르미날’은 19세기 말엽의 프랑스 광산노동자의 파업을 다루었다. 약 70여 일 동안 지속된 당시 광부들의 파업은 세계 최장기 파업이었다. 그런데 그 기록이 식민지 시대 원산에서 깨진다. 위대한 사건들이 흔히 그렇듯이 처음에는 사소한 불씨 하나가 던져졌다. 중유를 정제하던 ‘일출(日出)’이라는 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 노동자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고 노동조합은 이것을 민족적인 모욕이라고 분개하여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회사가 요구를 거부하고 일단 회사 차원에서 파업이 시작된 게 1928년 9월 16일이었다.

원산 시내를 행진하는 파업 노동자들.
원산 시내를 행진하는 파업 노동자들.

이 사태에 원산노련이 적극 개입하면서 상의로 대표되는 일본인 자본가 전체와 원산의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네 달에 걸친 대립과 조정, 결렬의 과정을 거치다가 드디어 원산노련은 1929년 1월 23일, 노동자 2,000여 명이 총파업 투쟁에 나섰다. 원산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파업 첫날 동아일보는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몹시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에 빠져있다”고 분위기를 묘사했다.

원산 총파업이 시작되자 전국에서 열렬한 성원이 줄을 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실린 격문, 격전을 보낸 단체는 전국의 노동단체, 청년단체, 농민단체를 망라하며 해외에서도 일본과 중국, 멀리 프랑스에서도 지지선언과 격려문을 보냈다. 위문단을 파견한 곳도 있었고 익명의 동정금도 답지하였다. 일본 노동단체에서도 많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은 원산 총파업에 발맞추어 격문을 살포하고 쟁의기금을 모집했으며 일본노동단체와 연대하여 원산노동쟁의 응원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일본 고베 항과 오다루 항에서는 동정파업까지 단행했다. 원산항에 정박 중인 화물선 일본인 선원들도 함께 ‘파업 만세’를 외치며 동조하였다. 국가로 따지면 적국이었지만 제국주의 자본에 맞서는 노동자들에게 국적은 없었다.

원산노동연합회 건물 모습.
원산노동연합회 건물 모습.

자유노동자들과 소규모 공장 노동자들까지 파업에 가세하여 숫자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의 가족까지 더하면 원산시 전체의 파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업과 운수, 교통 기관 등이 모두 정지했고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에 대비해 식량과 자금을 모았다. 술 한 모금, 담배 한 개비도 반동이라는 엄격한 규율 아래 노동자들은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며 1만 2,000원의 파업기금을 마련했다. 쌀 한 가마가 5원이었으니 무려 2,400가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원산 시민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처지가 되어갔다. 노련에 속한 노동자와 그 가족은 파업자금과 식량을 배급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이들을 위해 만주에서 급히 좁쌀 500가마를 들여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일제는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이들은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었고 파업에 동조했던 노동자 중에 생계를 위협받는 이들이 하나 둘 함남노동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파업을 단행한 후 한 사람의 이탈자도 없었는데 함남노동회가 생기면서 파업에서 이탈하는 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주요 인물에 대한 테러와 납치, 검거가 이어졌다. 2월 3일, 원산청년동맹 주요 맹원들의 검거를 시작으로 5일에는 노련 상임집행위원들이 잡혀 들어갔다.

검거와 압수수색이 이어지며 노련 지도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노련 장부와 현금, 예금통장 등도 압수되었다. 그래도 파업을 풀지 않자 일제는 총공격에 돌입한다. 경찰과 군인, 기마 헌병까지 투입된 원산 시가지는 전쟁을 방불하였다. 거리 곳곳에서 노동자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원산시내는 유혈과 공포가 몰아치는 계엄 사태에 이르렀다. 4월 6일, 마침내 노련은 지도부 부재, 바닥난 파업자금,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이라는 상황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원산총파업은 80여 일만에 노동자들의 참담한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본과의 싸움은 언제나 패배를 딛고 가는 투쟁이다. 아흔아홉 번의 패배 뒤에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노동자다. 그런 의미에서 원산총파업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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