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80] 선크림
[윤석원의 농사일기 80] 선크림
  •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8.25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해졌다. 무척이나 무덥고 길었던 올 여름도 이제 초가을로 접어든 느낌이다. 원래 9월 말이면 미니사과 알프스오토메를 수확해야 하지만 올해는 봄에 입은 냉해로 수확할 것도 없고 판매할 것은 아예 없다. 열매가 없어 힘들었지만 5월부터 지금까지 약 4개월 동안은 나무 관리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아무튼 뜨거운 여름을 보내면서 얼굴은 많이 검어져 구리빛으로 변했다.

이웃 농민께서 “윤 교수도 이제는 좀 농민 같아졌다”고 하신다. “왜요, 얼굴이 많이 까매져서요?” 라고 물었더니, “아니 뭐 전체적으로 농민 태가 조금씩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처음 귀농했을 때 이웃농민들은 반신반의 했던 것 같다. 교수했다는 사람이 농사짓겠다고 농촌에 와 4년을 버티고 있으니 농부로 조금은 인정받는 것 같기도 하다.

여름철에는 새벽 5시면 이미 밖은 훤하다. 새벽에 할일을 하지 않으면 낮에는 너무 더워 일하기 어렵고 쉽게 지친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긴 바지와 소매가 긴 작업복 그리고 장화를 신으면 일할 준비가 끝난다. 과수원엔 풀도 많지만 가끔 뱀도 나타나기 때문에 장화를 신는 것은 필수다.

농작업 준비과정에서 늘 빼먹거나 잊어버리는 작업이 선크림 바르는 일이다. 피부암에 걸리니 선크림은 꼭 바르라고 신신당부하는 아내 때문에 바르기는 하나 빼먹기 일쑤이고 도무지 귀찮고 성가시다. 평생 선크림 바르지 않고 햇빛에 노출되어 농사일하는 농민들은 모두 피부암에 걸려야 하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선크림을 왜 꼭 발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소에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다가도 야외에 나가거나 운동을 할 때는 열심히 바른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암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얼굴이나 팔이 까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도시인이라면 얼굴이나 손·팔이 하얘야지, 까매서는 뭔가 세련되지 못한 것 같고 밖에서 힘든 일을 하는 것 같은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의 내면에는 정신노동자가 육체노동자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존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일하는 사람들이 밖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보다 낫다는 그릇된 인식이 나도 모르게 각인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논리적 비약인지 모르겠으나 조금 더 들어가면 자본이 노동보다 우월하다는 자본 만능주의의 폐해가 부지불식간에 세뇌됐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은 어떤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돈이 노동의 가치보다 우월하고, 정신적 노동이 육체적 노동보다 우월하며, 하얀 얼굴이 검게 그을은 얼굴보다 세련되고 멋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전유물일 뿐이라고 생각할까.

아무튼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진리는 하얀 얼굴에 펜대 잡고 앉아 겉으로는 고상한 척, 멋있는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더럽고 역겹고 구린내 나는 추악한 일들을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저지르는 자들 보다는, 까만 얼굴로 덜 세련돼 보일지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백 번 천 번 귀하고 아름답고 멋진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평생 하얀 얼굴로 살다가 인생후반부에는 까만 얼굴로 농사일하며 살고 있는 나는 매우 어렵겠지만 죽는 날까지 멋진 까만 쪽에 끼일 수 있도록 사고하고 행동해야겠다고 오늘도 다짐해 본다. 선크림을 발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