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당포③ 견습생 일기

  • 입력 2019.08.18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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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1년 여름, 서울 종로4가 세운상가 근방의 한 전당포.

갓 군복무를 마치고 나온 청년 윤석현이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들어간 곳은, 먼 친척 노인이 주인으로 있던 전당포였다. 전당포 견습 직원으로 들어간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시계공부’였다.

-시계를 알면 전당포 공부는 다 한 셈이지. 20년 넘게 전당포를 한 나도 잘 몰라서 가끔 실수를 한다니까. 우선 종류부터 익혀야 하는데…이 시계 상표가 뭐지?

-아이고, 이건 워낙 유명한 시계니까 알지요. 롤렉스요.

-자, 그럼 어디 살펴봐라. 언제 나온 제품이지?

-글쎄요, 아무리 봐도 언제 만들었는지 그 연도는 안 보이는데….

-뒤집어서 뒤쪽을 보면…여기 이게 이 시계의 고유 번호라는 거다.

-고유번호만 보고 제품이 출시된 연도를 알 수 있다고요?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알 수 있지. 이건 1965년도에 나온 제품이다. 이 쪽 것은 오메가시계고, 또 이건 미제 부로바시곈데 63년도 제품이야. 공부를 하려면 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 내가 참고자료를 줄 테니까 잘 보고 배워 둬라. 그런데 전당업에 종사하려면 시계의 종류와 제품 생산 연도만 알아서는 어림없다. 물건을 받았다 하면 그 상태를 상중하로 척척 구분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첫날 전당포 주인이 시계공부 할 때 참고하라고 저에게 건네준 인쇄물을 보니까, 시계의 종류는 물론이고, 고유번호별 생산연도 뭐 이런 것들이 좍 나와 있더라고요. 문제는 시계를 전당물로 잡았을 경우 그 상태를 파악해서 가치를 매겨야 하는데 그게 또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긁힌 자국이 있는지도 살펴야 하고, 방수가 잘 안 되면 부옇게 습기가 서리니까 그것도 봐야 하고…어이구,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첫날 아예 포기하고 나올 뻔했다니까요.”

같은 롤렉스시계라도 상중하로만 가치를 매기는 게 아니라 상에서 다시 상중하, 중에서 다시 상중하…이런 식으로 분류해서 평가를 한 다음에 대출 액수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윤석현의 ‘전당포 직원 되기 연수’는 장부 정리하는 법, 고객에게 발급하는 전당표 작성하는 법, 이자 계산하는 법 등으로 길게 이어졌다. 문제는 근무환경이었다.

“전당포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여름은 딱 질색이에요. 첫날 그 비좁은 공간에 들앉아 있다 보니까 땀이 비 오듯 흐르는데 부채질은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어요. 제대한 지 며칠 안 지났겠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 군인정신으로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내 와서 틀려고 했는데…어이구, 주인한테 맞아 죽을 뻔했어요. 손님이 맡긴 물품은 마누라보다 아껴야 한다고….”

그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추레한 차림의 한 남자가 주춤거리며 창구 앞을 기웃거렸다. 그는 곧장 팔목에서 시계부터 풀었다.

-급전이 좀 필요해서 그러는데, 이 시계 얼마나 줄 수 있습니까?

-어디 좀 봅시다. 태엽 손잡이 닳은 거 보니 꽤 오래됐네요. 습기가 차 있는 것 보니 방수도 잘 안 되고…얼마나 쓰려고요?

-2,000원이 필요한데….

-에이, 2,000원 어림없어. 800원은 드릴 수 있는데.

-그럼, 뭐…할 수 없지요. 그거라도 주세요.

사나흘은 굶은 듯한 걸음걸이로 찾아왔던 그 남자는 현금 800원을 받아 쥐었는데도, 여전히 피곤기 어린 표정을 하고서 비칠비칠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윤석현은 생각했다. 장차 자신이 하려는 일이 매양 유쾌하고 신나는 일만은 아닐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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