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멍투성이 산하

  • 입력 2019.08.18 18:00
  • 기자명 주영태(전북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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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태(전북 고창)
주영태(전북 고창)

어느날 술참기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꿈에 허덕이다 깨어난 적이 있다. 멍하니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차를 몰고 가다보니 지리산 성삼재에 다다랐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에 목 늘어난 흰 티셔츠를 입고 고무신과 주머니에는 담배와 라이터, 휴대폰이 전부였다.

운무 낀 지리산은 쉽게 벗겨지지 않고 바로 앞 시야확보도 안되고 한여름 맞나 할 정도로 추웠다. 그 기분이 엊저녁 사나웠던 꿈을 씻어 주기라도 하듯 상큼하다.

노고단 전망대에 올라 장엄한 일출을 기대했으나 솜털에 맺힌 이슬에 바람이 부니 오들오들 떨리듯 더 이상 못 있겠어서 내려와 버렸다.

어디 가지? 기왕지사 걸음했는데…. 구례에 지인들을 만나러 갈까? 산내에 나무형님과 벌래형을 만나러 갈까, 엄천강 수달아빠를 보러갈까? 내려오는 동안 갈등 끝에 ‘에잇 풀이나 베러 가야겠다’ 하고 고속도로에 들어섰더니 산 위와는 전혀 딴판세상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불덩이 지고 앉은뱅이 작두콩보다 더 커버린 풀을 베며 땀이 흥건하게 흘러 축축하지만 기분은 되레 상큼하다.

얼음물 한 잔 꺼내들고 마시는 찰나 옆밭 사장님이 지나다 멈추어 말을 건내온다. 무와 양파 7만평 농사짓는 귀농하신 분이다. 얼음물 한 병 건네며 인사치레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노메 정부 해도 해도 너무한다”로 시작한 비난이 그치질 않는다. 잘 할 줄 알고 찍어줬더니 가면 갈수록 더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계절진폭을 보기위해 갈아엎지 않고 7만평 모두 박스 작업하여 저온창고에 넣어뒀다고 한다. 가격이 봄보다는 좋아 더 이상 저장해놓는 것도 의미 없어서 시장에 내놓는데 저장창고 추가 임대료나 갚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꺼지게 내놓는다.

아, 꿈. 이런 소릴 들으려고 밤새 꿈이 그리 사나웠나.

비정규직 노동자와 해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일 한창이고 이 염천에 철탑고공에 올라 목숨을 건 투쟁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나라 정부이다. 국정을 농단한 년놈들은 감옥에서 내어주고 이제 최순실과 박근혜만 풀어주면 다 내어준다 하고 토착왜구들은 대법원에서 확정판결한 친일파를 독립운동가로 둔갑시켜 정신을 기리겠다고 사랑방을 만들어 폭염을 부추기고 있다.

농림예산의 95%를 토건족 아가리에 쳐넣는 국개들, 장관직이나 농업비서관 자리를 지들 출세의 도구로나 보며 그 발판삼아 큰일을 하겠다며 내년 총선에 출마한다던 것들 모두 큰일이라는 것이 대체 뭘까?

온 나라 산과 들에 그럴싸한 이름을 빌미로 해서 해년마다 되풀이되는 재앙을 그대로 둔 채 국토를 마구 파헤쳐 놓는 작금의 현실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의 공동체를 복구하겠다고 농촌양극화를 막아보겠다고 농민수당 서명용지를 들고 마을마다 침 튀기며 발품 재촉해가는 전국의 농민동지들이, 철탑감옥에 갇힌 노동자들이 같이 살자 그리 외쳐대는데도 나라살림하는 놈들의 작태를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다.

마을을 돌며 성향 괜찮은 언제부터인가 마음 가던 농형제와 말하다 뜨악 진절머리가 나는 대화를 두고 어찌해야 하나 하고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 않아 거리를 저만치 두고 수틀리면 한판 붙어부러야 쓰것다고 했던 이 마음을 새로 고쳐먹는다. 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마음을 곧추세워 다시금 밑불을 때던 촛불 바다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미 보릿고개를 넘어섰지만 진행형인 신보릿고개. 오곡백과 익어가는 가을의 문턱에 들어와 있는데도 퍽퍽한 살림살이. 나 하나가 아닌 농촌사회의 공통적인 중소농가의 설움이다.

제 때에 인건비가 없어 사람을 못 대어주니 온통 풀밭에 갈아엎기 일쑤인 현실에서 주저앉아버리고픈 맘 문득문득 들어 산이야 바다야 후적후적 맘 가는대로 떠다니고 싶은 맘이 강하게 인다. 하지만 마을 시정에서 담소 나누는 마을 아짐들과 아재들의 격려에 다시 이 앙다물어 진다.

이 산하의 아름다움이 멍이 아닌 푸르름으로 멋진 풍광으로 더해가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오늘도 두 발에 힘 실어 발걸음 재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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