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1] 아, 원산 총파업! (1)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31] 아, 원산 총파업! (1)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8.18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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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31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알려진 명사십리가 있는 곳이 지금 북한 땅인 원산이다. 이미 1920년대에 원산은 큰 도시였다. 원산은 동해안에서 유일한 무역항으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천혜의 항구였다. 위에서 내려온 호도반도와 아래에서 올라간 갈마반도가 원산항을 둘러싸고 천연 방파제가 되어주었다. 그런 조건 때문에 1880년 최초로 외국에게 개방된 항구이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강요하면서 인천과 원산을 우선적으로 원했다. 그 중에도 원산에 발을 딛기를 서둘러 인천보다도 2년이나 먼저 개항을 하였다.

최고의 휴양지였던 원산 명사십리.
최고의 휴양지였던 원산 명사십리.

원산에는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조직이 만들어져 커다란 세력으로 자라나 있었다. 처음에는 자연발생적인 노동자들의 자조단체였으나 20여 년이 흐르면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준이 되었다. 원산에 가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풍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1909년에 자연스럽게 만든 단체가 도중(都中)이었다. 각 고용주 별로 조직되어 십장이 이끌던 도중은 아직 의식적인 노동자 조직은 아니었다. 그런데 3.1항쟁을 전기로 급격하게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이념 세례를 받으며 원산 노동자들이 계급적으로 각성하게 되었다. 이런 기운을 타고 1921년 이영노, 김경식, 김경모 등에 의해 원산노동회가 조직되었다. 회원 수 800명으로 시작한 원산노동회는 이듬해 곡물부와 잡화부가 딸린 소비조합을 설립했고 회관을 사들이는 등 규모와 재정이 팽창되어 갔다. 그리하여 1925년 11월에 김경식을 위원장으로 하여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원산노동연합회였다.

일제강점기 원산항의 모습.
일제강점기 원산항의 모습.

원산노련은 노동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하여 소비조합 외에도 노동병원, 이발소, 구제부 등의 사업도 운영하였다. 소비조합에는 언제나 양곡과 잡화가 풍성하게 쌓여 있어 조합원들이 값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고 일반 인민들도 많이 이용하였다. 노동병원은 1927년에 설립되었고 원장은 함경북도의 열렬한 사회운동가였던 차철순이었다. 의사, 약제사, 간호원과 10여 개의 병실을 갖추었는데, 노련 회원에게는 약값의 40%를 깎아주어 누구나 노동병원을 이용했다. 이발소 역시 15전의 싼 값이어서 언제나 사람으로 붐볐다.

원산노련의 자금적립방식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노련 소속 노동자들은 그 소득이 많거나 적거나 일단 그날 소득을 모두 도중에 납입한다. 도중은 병이나 사고 등으로 결근한 사람 몫까지 계산에 넣어 각 노동자에게 평등하게 분배하는데, 이렇게 지급된 자신의 임금 중에 100분의 1을 회비로 납부하였다. 이렇게 해서 모이는 회비 총액은 연간 1만7,000여원에 달했다. 또한 원산노련은 원산의 주요 운수업자들과 단체협약을 체결하여 일체 노동조건과 노동자 해고 및 고용은 노련과 업주 간 합의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즉, 노동자를 해고할 때는 노련 측 동의를 얻어야 하며 고용이 필요할 때는 노련으로 하여금 필요한 인원을 모집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원산의 웬만한 공장이나 업체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으며 잔업을 하는 경우에는 1.5배의 수당이 보장되었다. 또한 노련은 투쟁을 통하여 9년 동안 임금을 두 배로 올려놓았다.

노동자에게는 원산노련이 친근한 벗이었지만, 자본가 측에서 보면 눈엣가시였다. 굳은 단결력을 자랑하는 2,000여명 노동자와 특유의 자금조달방법으로 3만여 원의 자금을 적립해두고 자본가에 대립하는 원산노련의 존재는 원산 뿐 아니라 전국적인 모범으로 퍼져나갈 우려가 있었다. 그것은 자본가 측뿐만 아니라 식민통치 전체의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화약고였다. 이들은 원산노련의 성장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공통 인식에 다다랐고 원산노련을 붕괴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섣불리 덤벼들 수는 없었다. 조선 최고 조직력과 자금력을 가진 원산노련을 깨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드디어 일제와 조선 노동자들의 한 판 승부, 당시 세계 최장기 파업의 기록을 세운 원산 총파업의 날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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