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농촌엔 ‘자리’들이 많았다

[한국농정신문 창간 20주년 기획] - 충북 진천 관지미의 1년③

  • 입력 2019.08.11 18:00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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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결혼 후 충북 진천 사당마을에 자리 잡은 김상만·강창성씨 부부가 그들의 오래된 보금자리 앞에 나란히 섰다. 손을 잡고 서로에게 몸을 기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최고의 잉꼬부부로 통한다. 한승호 기자
결혼 후 충북 진천 사당마을에 자리 잡은 김상만·강창성씨 부부가 그들의 오래된 보금자리 앞에 나란히 섰다. 손을 잡고 서로에게 몸을 기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던 이들 부부는 마을에서 최고의 잉꼬부부로 통한다. 한승호 기자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날, 도시는 점점 팽창하고 농촌은 몰락해갑니다.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농촌은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간 20주년을 맞아 <한국농정>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그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히려 연재기획을 시작합니다. 30년을 도시에서만 자란 청년이 1년 동안 한 농촌마을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경험을 공유하며 농촌과 도시를 연결하고자 합니다.

마을에 인사를 드린 뒤, 이제 가구마다 일대일로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 속으로 들어갑니다. 첫 번째 순서는 노인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만(75)씨와 그 아내 강창성(75)씨 댁입니다. 이번에는 오랫동안 마을의 일을 도맡았던 김씨의 세월을 통해 농촌마을 속 질서를 이끈 직책들에 대해 배워봅니다.

김상만·강창성씨 부부는 동갑내기로, 결혼하기 전엔 관지미 인근의 두 마을에서 각각 자랐습니다. 그러다 지난 1972년 결혼한 뒤 1년쯤 지나 관지미로 들어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중매를 통해 한 달 만에 결혼을 했다는데, 거기에는 조금 재밌고도 슬픈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딸이라고 공부도 안 시켰는데 동생은 학교도 갔어. 근데 결혼도 얘가 더 빨리하게 생긴 거야. 억울해서 시방(지금) 추석 지나고 바로 해야겠다 싶었지.”

가정에서조차 여성들이 차별을 피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강창성씨는 결혼만이라도 동생보다 빨리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농촌에선 비교적 풍족한 추수철 즈음이 결혼하기 좋은 때였다고 하네요. 거기다 둘 다 20대 후반이었으니 시절을 생각하면 결혼하기에 좀 늦은 나이였기에 서두르고 싶기도 했지요. 신랑 얼굴이 잘생긴 편이었다곤 하나(사실 그 이유가 좀 컸다고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늦여름에 처음 만나 두 달도 안 돼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새삼 엄청난 세대 차이를 느꼈는데요. 어쨌거나 이 집은 관지미에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살던 마을에는 마땅히 얻을 집이 없어서 신혼집을 관지미에 얻기로 결심했을 때, 김상만씨가 자란 마을의 가까운 어른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고 합니다.

“거기 가면 원래 살던 사람들이 텃세를 엄청 부릴 텐데 어쩌려고 그래?”

관지미 역시 당시 대부분의 농촌마을들처럼 외부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새 마을에 이사 가게 되면 필연 텃세와 따돌림이 있을 텐데, 과연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죠. 김상만씨는 그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서 농촌의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았는데, 덕분에 마을에서 살아 온 47년 동안 이장·새마을지도자·대동계장·작업반장 등 맡아보지 않은 마을 일이 없다시피 합니다. 농촌의 질서가 어떻게 이뤄져왔는지 배워 볼 좋은 기회입니다.

우선 존재감이 희미해진 역할부터 볼까요. 새마을지도자는 박정희 정권이 농촌근대화를 위해 추진했던 ‘새마을운동’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주체였습니다. 즉 새마을지도자는 마을에서 뽑혀 국가에서 교육 받고 돌아와 각종 사업을 지도하는 사람들이었죠. 당시 정권은 시멘트, 슬레이트, 철골 등의 자재를 전국의 각 마을로 내려 보내 스스로 집을 짓고 마을길을 포장하게 했습니다. 농촌의 초가집은 이때가 돼서야 다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했지요. 김상만씨는 당시에 정말 열심히 이 일을 수행했다고 하는데, 면마다 가장 우수한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를 한명씩 뽑아서 내린 대통령상을 수상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정말 그때는 우리 집이 엄청나게 바빠서, 우리 농사일은 밤이 되서야 하곤 했어. 남편이 이 동네 지붕을 다 슬레이트로 바꿨거든. 그래서 대통령한테 상도 받았지. 엄청 바빴지만 그래도 나한테까지 일은 안 시켰어. 나도 뭐 애들 키우느라 바빴으니까. 상금은 다 마을 기금으로 넣었어.”

마을기금 얘기가 나오니 이제 대동계장 얘기도 짧게 듣습니다. 대동계장은 마을의 공금을 관리하고 경조사를 챙깁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누가 돌아가시면 마을 사람들이 대동계를 통해 직접 합심해서 장례를 치렀죠. 지금이야 장례 같은 일은 장례식장이나 상조회사에 맡겨버리는 일이 대부분이고,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해 마을이 위축되다보니 대동계의 역할은 많이 줄었습니다. 마을에 따라선 이장이 겸직하거나 아예 사라진 곳도 부지기수라 하네요.

다음은 작업반장입니다. 지금은 논농사의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어 기계와 그 조작인원을 빌려서라도 혼자 혹은 소수로 농사를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아직 기계가 없었던 1970년대는 물론이고 막 기계화가 진행 중이던 1980년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어쨌거나 최소 필요 인력이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논농사에 제법 많은 수가 필요했습니다.

“콤바인이 막 들어왔을 때만 해도 쌀 수확엔 여섯 명, 일곱 명 정도가 필요했어. 지금은 콤바인이 6조, 7조도 나오지만 그 땐 기껏해야 2조, 3조였던 데다 쏟아지는 쌀도 일일이 사람이 담고 포장해야 했거든. 지금은 콤바인 움직이는 사람이랑 도와줄 한명만 더 있으면 되니까 작업반이 필요 없지.”

그래서 흔히 반장이라고 부르는 이 직책은 품앗이가 아직 존재하던 시절 농사일을 이끄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 옛날 김상만씨는 마을에서 기계를 잘 다루는 젊은이였고, 자연히 농기계보급화가 막 이뤄지던 시절 오랜 기간 반장을 맡게 됐습니다. 덧붙여, 이 시기 정부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쓸 농기계를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했는데 기계의 소유권과 사용우선권을 놓고 많은 마을에서 갈등이 빚어졌죠. 관지미와 김상만씨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사실 이런 문제들은 지금에 와서도 농촌의 이해에 중요한 사례들이죠.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날을 잡아 들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도시 사람들에게도 최소 그 이름은 익숙한 ‘이장’입니다. 사실상 농촌의 모든 ‘자리’들이 유명무실해져가는 가운데 여전히 그 위상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직책입니다. 이장은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을의 대표이자 그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부락에서 아쉬운 거 면에다 부탁해 처리하고, 면사무소에서 행정적으로 마을에 요구할 일이 있으면 그걸 받아와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도 이장의 역할이지. 농사지을 때 필요한 자재나 종자 신청 받아서 비용 걷어서 전달하는 것도 이장이야. 물론 요새는 개인적인 일들은 면에서 다 우편으로 서류를 보내주고, 눈이 좀 밝다 하는 사람들은 직접 면에 가서 처리하기도 해.”

그래서 이장은 읍·면사무소(지금은 행정복지센터라고 하지요)와 농협을 수시로 드나듭니다. 모든 사람들이 면을 자주 오갈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일을 이장에게 위임해서 처리하는데, 정보화시대인 지금도 과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농촌의 고령화 수준을 생각하면 납득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마을을 빠져나가기 힘든 어르신들이 부지기수니까요. 또 행정에서 주는 각종 정보는 이장에게 가장 먼저 도달하니, 21세기에도 그 역할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어쨌든 지금도 이장은 매우 중요해. 아직도 큰 마을은 서로 하려고 해서 경선이 벌어지기도 하고. 우린 마을이 작아서 그런 일은 없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밀어서 하지. 최근까지도 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이장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만했어.”

김상만씨는 2015년경까지 두 번째로 이장을 맡았다가 유주영 이장에게 자리를 물려줬습니다. 이장은 보통 마을회의나 대동계에서 뽑아 정해진 임기 없이 마을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 하에 계속 일을 수행하다 ‘적절한’ 시기에 바톤을 넘깁니다. 김상만씨는 면에서 열리는 이장회의를 다니다 ‘아 이제 나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젊은 사람들이 우리 마을 이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넘겼다고 하네요.

오늘 부부가 그린 모든 풍경엔 크건 작건 쪼그라든 농촌의 현실이 묻어 있어 서글픈 느낌도 들었습니다. 온갖 마을 일을 도맡으며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은 이제 흘러가버리고, 나이가 많아진 부부는 남의 논 기계작업을 해주는 것도 힘들어 그만두고 논 1만평과 텃밭만 조금 가꾸며 농촌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70세가 넘어서도 마을회관이든 어디든 항상 단짝 친구처럼 다니며 노인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활기를 담당하는 부부의 웃음은, 혹여나 농촌살이를 꿈꾸는 이들이 찾아온다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노년을 보내고 싶다’는 희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김상만·강창성씨 부부가 지난 6일 태풍 프란시스코의 북상 소식에 집 인근 밭에서 참깨를 수확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김상만·강창성씨 부부가 지난 6일 태풍 프란시스코의 북상 소식에 집 인근 밭에서 참깨를 수확하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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