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당포① 전당포를 찾아서

  • 입력 2019.08.0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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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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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장롱 서랍을 여닫으며 무엇인가를 찾는다. 없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째 없을까? 시집 올 때 해왔던 모본단 저고리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묵묵히 책만 들여다보고 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빈처>의 도입부 풍경이 이러하다. 그 작품은 바로 이 남편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1인칭 소설인데, 앞부분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나는 그만 묵묵하였다. 아내가 그것을 찾아 무엇을 하려는지 앎이라. 오늘 밤에 옆집 할멈을 시켜 잡히려 하는 것이다. 2년 동안에 돈 한 푼 나는 데 없고, 그대로 주리면 시장할 줄 알아 기구(器具)와 의복을 전당국 창고에 디밀거나, 고물상 한 구석에 세워두고 돈을 얻어 오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아내가 하나 남은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것도 아침거리를 장만하려 함이다. 나는 입맛을 쩍쩍 다시고 폈던 책을 덮으며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이라면 이따위 고등룸펜을 남편으로 ‘거느리고’ 살 여인은 아무도(아니, 거의) 없을 것이다. 현진건이 소설 <빈처>를 발표했던 때는 일제치하이던 1921년이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전당국 창고(典當局倉庫)가 바로 뒷날의 전당포다. ‘물품이나 유가증권을 담보로 보관하고, 자금을 빌려주고 이자를 얻는 금융기관’ - 전당포의 사전적인 풀이는 이러하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당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곧 고리대금업자라는 인식 때문에, 대개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전당포는 미담이나 사랑이 싹트는 공간은 아니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재판정에서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으로부터 3,000 더커트의 돈을 빌려간 사람이 원리금을 제 때 갚지 못 했다는 이유로, ‘저당 잡힌 채무자의 살’ 1파운드를 칼로 도려내느냐 마느냐 하는 살벌한 공방이 벌어진다. 그런가 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급기야 가난한 대학생이 전당포의 노파를 끔찍하게도 도끼로 살해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문학작품 속(그것도 외국의) 얘기다. 어지간히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옛적의 우리네 전당포를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릴 만하지 않을까? 그 시절 전당포는 가난한 서민들이 급전을 융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금융기관이라기보다는 생활 주변에 있던 ‘구두쇠 영감의 쌈지’ 같은 곳이었다. 1980년대 이전에 사회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전당포에 얽힌 나름의 경험들을 한두 가지 쯤 가지고 있을 터, 이제부터 바로 그 전당포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나는 서기 2000년 어름에 한 동안, 지난 시절 우리의 풍속사를 라디오 다큐 형식으로 방송하는 <일요다큐멘터리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KBS 라디오)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재와 집필을 맡아서 일했는데 전당포 얘기를 해보자, 마음먹고 취재에 나섰던 때가 2001년 여름이었다.

그런데 수도권 여기저기를 한 나절이 넘게 발품을 팔았는데도, 예전에 그토록 즐비하던 전당포 간판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하여 알아낸 곳이 경기도 안양 시내에 있던 ‘성우사’라는 전당포였다. 1971년도에 전당포를 차린 이후 30년 동안 그 일을 해왔다는 주인 윤석현 씨(1944년생)는, 내가 귀중품 보관창고부터 구경시켜 달라고 하자 매서운 눈을 하고서, 썩 볼품없는 내 외양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방송국에서 취재 나온 것 맞아요? 글 쓰는 작가가 틀림없지요? 여기 명함에 찍힌 전화번호로 확인해 봐도 돼요? 내가…가짜 롤렉스시계 맡았다가 몇 번 당한 적이 있어서….”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그는 지문을 대조하자거나, 혹은 보석 감정사처럼 내 동공에 현미경을 들이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로부터 ‘진품 판정’을 받고 나서야 귀중품 진열 창고에 입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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