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9] 도한(屠漢)의 꿈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8.04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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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도한이라는 단어는 1920년대에 무려 40만 명 이상이 종사하던 직업을 이르는 말이다. 짐승을 도살하는 자라는 뜻 그대로 흔히 백정이라고 부른다. 백정 계급에는 도한만 있는 게 아니고 버들가지로 광주리 등을 만드는 고리백정, 신발을 만들던 갖바치, 노를 젓던 수척, 숯을 굽던 산척 등 여러 직종이 있었다. 1884년 갑오개혁 때 이들은 형식적으로 신분의 억압에서 해방되었으나, 1920년대까지도 차별과 사회적 불이익은 여전하였다. 심지어 호적에 자신의 직업을 써넣어야 했으며 백정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학업을 지속하기도,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수도 없었다.

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이들은 사실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 만한 동기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들을 그토록 학대한 왕조가 무너진 게 시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구국의 차원이 아니라 계급 해방의 차원이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형평운동이라고 부른다. 경남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형평운동은 많은 사회단체와 언론 등에서 적극 지원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최초로 발표된 백정들의 격문은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었는데 백정 출신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취업을 거부당한 장지필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악마와 같은 여러 계급으로부터 학대를 받을 때마다 호소할 곳도 없이 서로 껴안고 피눈물이 흐르도록 얼마나 울었던가? 우리 한 번 분기하여 이 골수에 맺힌 설움을 씻어내고 선조의 외로운 넋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어여쁜 우리의 자녀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게 하자…”

백정들의 이 운동은 형평사라는 조직을 통해 불과 한두 달 만에 전국에서 10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될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 이들은 안타깝게도 같은 조선 백성들이었다. 형평사 발기대회가 있던 진주에서는 농민들 2,000여 명이 몰려와 형평사 해체를 요구하며 백정에게서 쇠고기를 사지 말자는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형평사를 습격하는가 하면 시가행진을 벌이며 백정들을 반대하는 소란을 벌이기도 했다. 형평운동의 확산과 함께 반대운동도 전국으로 번져 학교에 입학한 백정 자녀를 퇴학시키고 백정을 무차별 구타하거나 식당에서 받지 않는 등 구시대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경남 진주의 형평운동 기념탑.
경남 진주의 형평운동 기념탑.

형평운동은 일본의 수평운동과 매우 유사하며 형평사와 수평사는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였고 몇 해 전에는 두 단체가 교류한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운동은 가장 밑바닥 계급이 자신의 해방을 위해 일어난 중요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들불처럼 일어났던 형평운동은 어느 운동이나 걸어가는 분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어느 곳이나 세력이 만들어지면 그 안에는 보수적인 성향과 보다 혁신적인 성향이 나타나게 된다. 형평사의 선진적인 그룹들은 이 계급운동이 민족의 해방과 반제국주의 투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각성하게 된다. 이들의 주도로 산하에 형평청년회, 형평여성동맹 등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다. 형평운동이 한창이던 1925년과 이듬해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1·2차 조선공산당이 결성되는데 이 때 형평사의 많은 회원들이 가담하게 된다. 물론 당이 일제에 의해 거듭 와해되면서 형평운동 또한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형평운동이 반제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일제는 직접적인 탄압에 나서 결국 강제로 해산당하고 만다. 백정의 신분 해방을 목표로 했던 형평운동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보편적인 명분과 함께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공동체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요컨대, 조선의 신분질서에 저항하여 백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반차별, 인권운동이었기 때문에 높은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 운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여전히 차별과 억압이 남아있는 작금에도 현재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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