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에서 귀여재로 가는 길
압구정에서 귀여재로 가는 길
  • 심증식 기자
  • 승인 2019.07.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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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ㅣ 한도숙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압구정’은 한명회가 지은 정자다. 이후 압구정은 조선 말기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하사됐다가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실각되면서 사라지게 됐다. 지금은 압구정, 정자는 사라졌지만 지명으로 남아있고 부유하고 화려한 강남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압구정은 한도숙 전 의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강남개발이 시작되기 전 압구정은 배받이었다. 한 전 의장의 아버지는 대지주의 마름으로 살았다. 지주보다 더 악독하다는 그 ‘마름’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착한 마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십 년 마름을 하면서도 땅 한 평 차지하지 못했다. 한 전 의장은 압구정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공고를 나왔으나 대학진학에 욕심을 냈고, 열심히 공부했건만 대학진학에는 실패했다.

“3학년 때 대학입시공부를 했는데 체계 없이 공부를 하다 보니 대학 가기가 어려웠지. 모의고사를 보면 충분히 서울권 대학을 갈 수 있었는데 실전에서는 안 되더라고.”

대학입시에 실패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 더 입시공부를 할 생각으로 경기도 평택으로 내려 왔다. 평택은 압구정 지주가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토지 보상을 받고 대토로 사놓은 땅이 있는 곳이다. 평택 서탄에서 아버지 친구분들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병행했다.

“1년 정도 애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누가 취업을 권해서 학교 선배가 하는 공장에 들어갔어. 식관을 만드는 공장이야. 통조림 깡통을 만드는 공장이지. 배정된 라인을 돌아보면 되는 일인데, 일이 많지 않아서 틈틈이 책을 보다가 반장한테 걸려서 혼나기도 하고…. 3개월 정도 했는데 적응을 못하고 그만 두고 나왔어.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회사생활이 맞지 않은 거 같아.”

직장을 그만두고는 군대에 갔다 와서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입대를 했다. 그런데 제대 후에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매형이 충남 아산에서 엄청 크게 과수원을 임대했어. 과수원 3만평, 논밭 2만평 농사를 하게 되면서 혼자 버거우니 같이 농사를 짓자고 하는 거야.” 이렇게 시작한 농사는 그에게 딱 맞는 일이었다.

“농사는 종합적 사고와 행동이 필요한 거야. 일꾼들 부릴 줄도 알아야 하고, 자연의 이치도 알아야 하고, 그게 나한테 딱 맞더라고. 어릴 때 과수원에 있어봐서 새로울 게 없는 데도 씨앗이 싹을 틔워 흙을 밀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경이롭고.”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과 본지 사장을 역임했던 한도숙 전 의장이 새로 조성한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한 전 의장은 “전농이라는 조직이 갖고 있는 역사적 소명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무거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과 본지 사장을 역임했던 한도숙 전 의장이 새로 조성한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한 전 의장은 “전농이라는 조직이 갖고 있는 역사적 소명이 있기 때문에 책임감이 더 무거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결혼 그리고 독립

한 전 의장은 농사일에 열성을 보였다. 얼마안가 일 잘하고 똑똑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나중에 장모되실 분이 그를 눈여겨봤다. “장모님이 동네 분을 시켜서 서울에 직장 다니는 누구네 딸이 있는데 선을 보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집사람을 만나게 됐어. 그 즈음 선을 몇 번 봤는데 농사짓는다고 하니 다 돌아섰는데 이 사람은 농사짓는 것도 좋다고 했어.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하고 아산에서 1년을 더 살았지.”

이 때 그의 아버지는 압구정 지주가 평택에 사놓은 과수원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아버지가 농사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하셔서 내가 그걸 맡기로 했어. 매형한테 그 동안 같이 일한 삯으로 300만원을 받아서 젖소 2마리 사고, 아버지가 3마리 사주셔서 5마리로 낙농을 시작했지.” 이후 평택에서 자리를 잡게 됐다. 낙농을 하면서 농사정보를 얻으려고 낙우회에 나가게 됐는데, 거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1979년 박정희가 쓰러지면서 18년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억눌렸던 민주화의 물결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12.12와 5.18을 거치면서 신군부가 등장했고, 5공 독재가 다시 시작됐지만 사회 곳곳에서는 민주화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평온한 농촌마을 평택의 구석에서도 몇몇 인사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낙우회에 나가고 어울리면서 현 농정에 대한 울분과 비판을 터트린 거야.”

1985년 여름 전국 각지에서는 소몰이 투쟁이 벌어졌다. 1983~1984년 갑자기 늘어난 소 수입으로 100만원 하던 송아지 한 마리 값이 20만원대로 폭락했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대대적으로 소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소값 폭락에 농민들은 서슬이 퍼런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소를 끌고 거리에 나왔다. 소위 ‘소몰이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한 전 의장은 이 때만 해도 평범한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소를 키우는 농민으로 소값 폭락의 피해자였고 소값 폭락으로 불안과 울분이 쌓였다. 이런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농민운동가들을 소개 해줬다. “정수일 평택농민회 고문을 소개 받았고 사무국장을 하는 장순범을 만나게 됐어.”

농민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더 키웠다. “농민회 존재조차 모르던 시절에 책으로만 보던 해남의 수세거부운동 같은 것이 여기에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던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평택 안중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989년 2월 13일 농민운동 역사의 획을 긋는 농민투쟁이 일어났다. 2.13농민대회다. 수세폐지와 고추값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의 농민들이 여의도에 모였다. 농민운동 역사상 최초의 대중적 농민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 전 의장은 평택농민회원들과 함께 이 대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를 통해서 농민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2.13농민대회를 마치고 그는 평택농민회 서탄면 면책임자를 맡았다.

농민운동가가 되다

“농사짓는 후배, 대학 졸업하고 농사짓는 친구, 농활 와서 정착한 청년 등 10여명이 모여서 서탄면 농민회를 만들었어. 그리고 내 위에 형들은 직접 가담 못하니 돈 내라고 했지. 후원금으로 매월 2만원, 5만원씩 내는 후원회원을 20명 정도 조직했지.” 그는 매형의 봉고차를 빌려서 농민대회에 적극적으로 다녔다.

“수세관련 집회를 하면 동네 사람들하고 인근동네 선배들을 중심으로 끌어 모았어. 봉고차 한 대는 무리 없이 채울 수 있었지.” 그런데 농민대회를 갔다 오고 나서는 난리가 났다. “농민대회를 같이 다녀온 후배가 와서는 큰일 났다고 면사무소에서 한도숙이 빨갱이라고 같이 다니지 말라고 했다는 거야. 자식들한테도 안 좋다고 만류하면서.”

당시 농민운동가들이 겪었던 일을 그 역시 비껴갈 수 없었다. 면사무소 파출소에서는 한 전 의장을 요주의 인물로 찍어 놓고 빨갱이라고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평택 서탄면 수월암리는 과거 이념갈등이 특히 심했던 지역이라 주민들의 피해의식이 깊었다.

“이곳이 평택 인민위원장을 배출한 지역이야. 그리고 일제 때 소작쟁의도 심하게 하던 곳이지. 그 시대를 겪어온 어른들이 피해의식이 있을 수밖에.” 관의 방해는 다양한 형태로 다가왔다.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농민운동을 방해했다. “빨갱이 낙인찍기와 더불어 송아지구입자금, 토지구입자금 등으로 회유를 하기도 했지. 그래서 떠난 사람들도 있었고.”

그 역시 회유 대상이었다. “이장이 집에 찾아와서 요새 잘 지내냐고 묻더라고. 이장이 동정 보고 하던 시절인데, 내가 어디를 가는지 매일 보고를 해야 하는 거야. 하루는 자기가 좀 귀찮다고 속내를 말하더니 이번에 토지구입자금 600만원이 내려오는데 다 너 준다고 말하더라고. 고맙다고 했지.”

그는 이 돈과 그동안 키우던 젖소를 모두 팔아 과수원 부지를 샀다. 이 때 장만한 땅에서 최근까지 배 과수원을 조성해 농사를 지었다. 이장이 한 전 의장을 회유하기 위해 농지구입자금을 지원해 줬지만 정부 지원을 받았다고 마음을 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각종 회유와 협박에도 한 전 의장은 굴하지 않았다. “어느 날 파출소장이 소총을 든 경찰 두 명을 양쪽에 대동하고 아버지 집에 찾아와서 협박을 하고 갔어.” 이런 일을 겪은 아버지는 항상 아들 걱정에 노심초사했다.

이렇듯 농민운동가에 대한 독재정권의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운동가들은 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운동가들은 정부의 정책에서 당연히 배제되기 일쑤였다. 한 전 의장은 농민후계자 자금을 받을 수 없었다. 신청하면 무조건 탈락이었다.

“농민회 해서 안 된다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더라고. 그러다가 잘 아는 분이 상담소 소장으로 와서 이번에는 후계자 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신청하라더라고. 그래서 후계자에 선정됐지. 후계자 자금 2,000만원 받아서 1만평 정도 땅을 샀어.”

평택농민회장, 경기도연맹 의장, 그리고 전농 의장

서탄면 회장으로 농민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평택농민회장을 맡았다. “당시에 과수원을 1만평 정도 하고 있어서 도저히 평택농민회장을 맡을 수가 없었는데 농민운동 초기에 어떤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 거야. ‘조직일 하는 사람은 개인일 보다 조직일이 우선’이라고, 이 말 한마디를 떠올리고 결국 나서게 됐어.”

이 한마디는 두고두고 한 전 의장이 농민운동을 하며 조직에 헌신하게 하는 지침이 됐다. 평택농민회장을 하면서 농사일은 소홀해졌다. “농사는 전폐하다시피 했어. 집사람이 농사일을 다 한 거나 마찬가지였지.”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그가 농민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4년간 평택농민회장을 하면서 평택농민회는 탄탄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시장도 무시 못 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어. 회원 80명, 후원회원 200명이 되는 조직으로 커졌지.” 회장을 마치니까 경기도연맹 의장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연맹 의장을 하라고 하는데 그건 도저히 자신이 없었어. 그런데 도연맹 감사, 부회장을 하면서 연대회의나 노동자 집회에 의장님을 대신해서 다닐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내가 차기 의장을 맡게 됐어.”

그가 전농 경기도연맹 의장이 된 것은 뛰어난 대중연설 솜씨가 크게 작용했다. 경기도연맹 임원들 중에서 연설을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꼽혀서 지역 연대단체 투쟁에 도연맹을 대표로 참석해 연설을 도맡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차기 도연맹 의장을 맡게 됐다. “도연맹 의장은 잘하지 못했어. 문경식 의장이 전농 조국통일위원장도 부탁해서 도연맹 의장과 전농 조국통일위원장을 겸임했는데 결국 둘 다 잘하지 못했지. 한 가지만 했어야 하는데….”

그는 도연맹 의장 2년 임기를 마치고 이례적으로 도연맹 부의장을 다시 맡았다. “차기 의장으로 안성에 이흥기 회장님이 맡기로 하셔서 내가 부의장으로 돕기로 했지. 도연맹 부의장 할 때 전국적으로 한-미 FTA 반대투쟁이 벌어지고 있었거든. 경기도에서도 20여개 농민단체를 모아서 한-미 FTA 저지 경기운동본부를 꾸리고 집행위원장을 맡아서 농민대회를 준비했어. 그날 집회에 경기도청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 2만명이나 운집을 했으니.”

2006년 11월 22일 전국 동시다발로 벌어진 ‘한-미 FTA 저지 백만인 총궐기대회’가 도별로 개최됐다. 집회는 격렬했고 이후 집회를 주최한 농민대표들이 대거 지명수배가 됐다. 그 역시 경기도 도청 집회의 주동자로 지명수배가 떨어졌다. “한 달을 도망 다니다가 경찰 조사 받고 벌금 300만원이 나왔지. 벌금을 계속 안내다가 전농 의장할 때 광주에서 제주도를 가려는데 공항에서 문제가 돼 결국 냈어.”

이후에 전농 의장을 맡게 됐다. 당시 전농 20년 역사상 최초로 경선을 통해 의장으로 선출되는 인물이 됐다. “문경식 의장님이 보자고해서 만났더니 당신이 전농 의장을 하라는 거야. 쉽게 추대해서 하는 건지 알았는데 전농 부의장이신 서정길 부의장님이 후보등록을 하시고 전북에서 밀고 난리가 아닌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경선을 치르게 되고 전국을 돌며 유세하고 다녔어.”

전농 의장으로써 그의 과제는 지금까지 수년간 계속된 FTA 저지투쟁, 쌀 재협상 반대투쟁 등으로 이완된 조직을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한 의장은 ‘조직강화’를 선거 공약으로 밝혔고 임기 동안 조직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전농 의장으로 지역에 내려가면 농민대통령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지. 그만큼 전농 의장이 갖고 있는 시대적 소명이 있는 거고. 전농 의장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전농이라는 조직에 대한 역사적 소명이 있기 때문에 전농 의장이 농민들에 대한 책임감이 무거운 거 같아.” 그가 밝힌 전농 의장의 소회다.

그는 전농 의장 임기를 마치고 <한국농정> 사장을 4년간 역임했다. 본지 사장 시절 농민운동을 하는 언론, 언론을 통한 농민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 본지에 칼럼과 사설, 대담 등을 통해 농업·농촌·농민의 가치와 개방농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내 꿈은 전정가위를 들고 죽는 거야. 그래서 내가 머무는 곳을 ‘귀여재’라고 이름을 지었지.” 한 전 의장은 <한국농정> 사장직을 마치고 다시 과수원으로 돌아갔다. 새로 조성한 과수원을 가꾸는 농민으로, 그리고 귀여재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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