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야간통금⑤ 즉결재판 풍경

  • 입력 2019.07.2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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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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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남부지역을 관할하는 즉결 재판소는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었다. 아침이 되면 각 경찰서로부터 실려 온 통금 위반자들로 재판 대기실은 금세 북새통을 이뤘다. 장발단속에 걸린 사람, 폭력을 휘두르다 잡혀온 사람, 유언비어 유포 혐의자 등 여타의 경범죄 위반자들도 함께였다.

197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 날, 경상도 상주 출신 총각 윤춘일과 송준식이, 공장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인 것까지는 좋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셔대다가 그만 통금 위반으로 적발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위반자들과 함께 경찰버스에 태워져서는 이른 아침에 즉결 재판소 앞마당에 부려졌다.

경범죄 사범에 대한 즉결재판도 재판은 재판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미 한두 번 경험을 했던 이들이 곁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어보니, 사나흘 동안 구류를 살 거라고 말하는가 하면, 벌금형을 받을 거라고도 했고, 혹은 그날 당직 판사의 기분에 따라서 무죄방면 처분이 내려지는 경우도 드물게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윤춘일 등은 제발 그 날 당직판사의 어젯밤 꿈자리가 좋았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경찰관이 대기실로 들어오더니,

-윤춘일, 송준식! 따라와!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을 콕 찍어서 밖으로 불렀다. 그렇잖아도 긴장감에 떨고 있던 그들은 이게 무슨 재변인가, 싶었다. 경찰은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더니 복도 끝의 당직 판사실로 밀어 넣었다.

-경찰관이 판사님께 가보라고 그래서….

두 사람이 자박대며 다가가 판사 앞에 섰다. 판사가 서류를 뒤적거리다 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꼭 무슨 고등학교 생활 지도 주임처럼 야단을 쳤다.

-고향이 경북 상주라고? 촌놈의 자식들이 서울에 왔으면 지킬 것 잘 지키고 다소곳이 지낼 일이지, 쓸 데 없이 밤늦게 돌아다니다가 잡혀 들어오기나 하고 말이야!

듣고 보니 기분이 살짝 나빴다. 윤춘일이 저도 모르게 사투리 억양으로 항변하였다.

-아니, 통금 위반한 건 잘못이지만, 우째 우리보고 촌놈들이라카십니꺼!

그러자 판사도 사투리로 맞받았다.

-내도 고향이 겡상도 상주라카이. 이제 됐나?

“그 젊은 판사가, 경범죄로 잡혀온 재판 대기자들의 진술조서를 미리 한 번 죽 훑어봤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아하, 요놈들 고향이 상주네? 그래서 우리 둘을 미리 불러들인 거지요. 판사가 말하기를, 너희 둘은 이따 재판 받을 때 판사의 질문에 이러저러 긴 말 하지 말고 이름을 부르면 ‘예!’ ‘잘못했습니다!’ 딱 두 마디만 해라, 그러더라고요.”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열 명씩 한꺼번에 판사 앞으로 불려갔다. 한두 마디 질문과 답변이 오간 다음에 몇 초 만에 판결이 내려졌다.

-김갑동, 이을동, 박병동, 최정동. 벌금 5,000원! 조무동이는 통금위반에다 노상방뇨까지 했으니 구류 3일, 정기동이는 파출소에서 기물을 파손했어? 구류 15일!

이런 식이었다. ‘벌금 5,000원’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5,000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윤춘일 씨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광명시 소화리에 있는 기아자동차에 다녔는데 일당이 1,300원이었어요. 철야를 해야 월급 6만원 받을까말까 했다니까요. 한 달 방세가 3,000원이었으니까 벌금이 5,000원이면….”

구류판결을 받은 사람은 다시 해당 경찰서로 실려 가서 유치장에 갇혔다. 벌금형 받은 사람은 당일 판결 후 4시간 이내에 납부하지 않으면 다시 구류에 처해졌으므로 재판소 공중전화가 불이 났다. 그럼 상주의 그 두 총각은 어찌 되었느냐고?

“약속한 대로 ‘예!’ ‘잘못했습니다!’ 두 마디만 했더니 판사가 석방! 그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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