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8] 젊은 그들 2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7.21 18:00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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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1920년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젊은 사회주의 그룹에는 남자들만 있던 게 아니었다. 아직 역사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운동사 첫머리에 있다. 그 중에도 트로이카라고 불린 이들이 있었으니 주세죽과 허정숙, 고명자였다. 공교롭게도 이 셋은 각기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이들은 실로 고난에 찬 삶을 살게 된다.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왼쪽부터).
허정숙, 주세죽, 고명자(왼쪽부터).

소설가 심훈이 ‘대리석으로 깍은 것 같은 미모’였다고 표현한 주세죽은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져 세간의 관심을 더 받았는데 약관의 나이에 상해에서 만난 박헌영과 결혼하였다. 주세죽은 함남 함흥 태생으로 1901년생이다. 중농 집안에서 태어나 영생여학교를 다녔고 피아노를 잘 쳤다. 주세죽은 삼일항쟁 시에 함흥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혔는데 한 달 동안 입에 담기 어려운 치욕적인 성고문을 받았다. 끔찍한 일을 당한 주세죽은 중국 상하이로 유학을 떠나고 거기에서 운명처럼 박헌영을 만난다. 먼저 와 있던 친구 허정숙의 소개였다. 박헌영, 김단야 등은 주세죽이 오기 전에 이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박헌영이 책임비서였고 주세죽도 고려공청에 가입해 기관지를 편집하는 등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했다.

레닌학교 시절의 김단야와 박헌영(앞줄 왼쪽 두 번째, 세 번째), 뒷줄 오른쪽 끝이 베트남 독립영웅 호치민.
레닌학교 시절의 김단야와 박헌영(앞줄 왼쪽 두 번째, 세 번째), 뒷줄 오른쪽 끝이 베트남 독립영웅 호치민.

 

이들은 조국에서 사회주의에 기반한 독립투쟁을 벌이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하지만 귀국 직후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일경에 체포되었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세 여인은 각기 남편들의 옥바라지를 하며 독립투쟁과 신여성으로서의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중에도 허정숙은 단연 발군의 활동을 보여주었다. 유명한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인 허정숙은 훗날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천수를 누린 탓에 금기의 이름이 되었지만 일제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맹렬한 운동가였다. 허정숙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일급의 문사이기도 해서 많은 글을 신문에 발표하였고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하는 등 대단한 활동력을 보여주었다. 공개적으로 단발머리를 한 최초의 여성으로도 알려졌는데 뿐만 아니라 자유연애, 많은 남성 편력 등으로도 유명했다. 심지어 전남편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할 정도로 시대를 앞서 간 여성이었다.

허정숙과 달리 주세죽과 고명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의 남편이었던 박헌영과 김단야가 각각 미제의 스파이,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한 것처럼 주세죽은 러시아에서 기나긴 유배 생활 끝에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고명자 역시 맹렬한 활동가였으나 끝까지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일제 말기에 변절하였다. 남편이었던 김단야와의 짧은 결혼 생활은 한 때의 낭만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녀는 해방 후에 다시 사회주의 운동으로 돌아와 여운형과 같은 노선을 걸었으나 전쟁 와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유명한 일화이자 가슴 아픈 역사이기도 한데, 사실 주세죽은 박헌영과 김단야 둘과 결혼하였다. 러시아 레닌학교 유학 후에 귀국한 박헌영이 일제에 체포되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주세죽은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김단야와 재혼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혼한 남편 김단야도 모함을 받아 이국 땅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의 경우와 비슷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주세죽은 1952년, 죽기 전에 두 남자를 똑같이 사랑했다고 회고했다. 박헌영과 사이에 낳은 딸 비비안나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무용수로 활동하다가 2013년에 사망했다.

허정숙은 직접 총을 들고 싸운 독립전사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투옥과 감시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최창익, 무정 등이 주도한 독립동맹의 조선의용대에서 총을 들었다. 해방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한 허정숙은 남로당이나 연안 출신들 대부분이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승승장구했다. 김일성 주석도 허정숙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녀의 독립투쟁 경력은 혁혁한 것이었다. 그녀는 북한에서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내고 1991년 8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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