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7] 젊은 그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7.14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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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1900년에 태어난 동갑내기 세 젊은이가 있었다. 삼일 항쟁 때 갓 스무 살이었던 이들은 항쟁에 직접 참여하면서 완전히 인생이 변한다. 그들의 인생만 변한 게 아니고 1920년대 한국사회를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맹렬한 독립운동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독립운동의 노선은 사회주의였다. 그 세 명의 이름은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다. 박헌영은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이름이지만 다른 두 사람은 상대적으로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인물이다. 혜성처럼 서울에 나타나 독립운동의 전선을 새롭게 구축해낸 이들은 누구였던가.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박헌영은 해방 직후에 발표한 저 유명한 문건 ‘8월 테제’에서 갑오농민전쟁과 삼일대항쟁을 언급하며 그 두 사건이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라고 규정한다. 그 자신이 항쟁 당시 경성고보에 다니며 시위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고, 이 때 사회주의 이념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훗날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되는 박헌영이 사회주의를 접하고 느꼈을 감동과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곧바로 상해로 망명하여 투쟁 전선에 뛰어든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삼일항쟁이 잉태한 최초의 직업혁명가였다.

경북 김천 출신의 김단야는 열여섯 살 때 이미 고향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을 당하는 등 반일의식이 투철한 열혈 청년이었다. 1919년 당시 서울의 배재고보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해 1월부터 비밀리에 반일 학생 써클에 가담했다. 이 써클에서는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 지하 신문을 간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열성적으로 항쟁에 참여하던 김단야는 시위가 지방으로 확산되어가자 고향인 김천으로 내려간다. 마치 유관순이 시위를 목적으로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경로인데 당시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택한 경로이기도 했다. 그는 시위를 주동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는데 일제 법원으로부터 태형, 그러니까 곤장 90대라는 선고를 받았다. 90대면 목숨이 위험한 중대한 형이었다. 태형을 당하고 나온 김단야는 곧바로 비밀결사체인 적성단에 가입하여 만주의 독립군관학교로 가는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을 하다가 그 자신도 1919년 12월 상해로 떠난다.

열혈혁명가 김단야.
열혈혁명가 김단야.

임원근은 삼일항쟁 때 일본 유학중이었다. 일본에서 이미 선진적인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그는 국내에서 항쟁이 터지자 주저 없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국내를 거쳐 역시 상해로 망명한 그는 운명처럼 박헌영과 김단야를 만나 동지가 된다. 생각해보면 겨우 스무 살짜리 청년들이 해외로 망명을 한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그들을 망명으로 이끈 힘은 삼일대항쟁이 직접적이었다. 항쟁의 용광로 속에서 단련된 사회적 자의식이 젊은 나이에 해외 망명을 결심한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망명지 상해에서 만난 세 사람은 정치사상적으로 같은 길을 걸었다. 1921년에 상해 한인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단 상해 지방회에 함께 가담했고, 1922년 봄부터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에 나란히 올랐다.

그들이 함께 몸담고 있던 고려공산청년단 상해 지방회 회원 수는 1921년 10월 현재 36명이었고, 그 중에는 학생 18명, 노동자 11명, 직업적 혁명가 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었다. 그는 훗날 소설 ‘동방의 애인’에서 당시의 청년 혁명가들의 삶과 사랑을 다루었는데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상해에서 견결한 사회주의자로 거듭난 세 사람은 국내에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잠입하다가 일제에 체포된다. 평양형무소에서 22개월의 형을 살고 나왔을 때 이들은 이십대 중반이었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들은 서울로 갔고 드디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24년 봄에 혜성처럼 서울의 운동 전선에 나타난 세 명의 사회주의자를 가리켜 사람들은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트로이카란 세 마리 말이 끄는 러시아식 마차다. 식민지하에서 신흥 사회주의 운동을 맹렬히 이끌어 가는 삼두마차, 바로 이것이 세 사람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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