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 노다지 맞는 한 채의 적막으로 앉아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8

  • 입력 2008.06.23 01:15
  • 기자명 이중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놋날 디룻 듯 장대비가 쏟아진다. 칠흑같이 어둔 밤이다. 나는 복숭아 작업장 한 켠에 앉아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나뭇잎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노다지 맞고 있는 나는 한 채의 적막이다. 빗소리가 우주 삼라만상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팬다. 이따금씩 시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차량의 불빛들이 밧줄 같이 굵은 빗줄기를 언뜻 언뜻 비춰주며 지나간다. 빗줄기는 팔만사찬 발이나 되는 하늘의 오랏줄 같다. 저 오랏줄이면 세상을 다 묶고도 여유가 있겠다.

어제는 동무 하나를 회봉산 중턱에 묻었다. 향년 53세. 90년대 말, 한국경제의 전방이 무너졌을 때, 그는 낙향하여 건달 농사꾼이 되었고 죽을 둥 살 둥 절망에만 백의종군해왔다. 가족은 해체되었고, 홀어머니는 그 아들 때문에 아마도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을 것이다. 그는 남하하는 백만 대군 단풍 행렬 북쪽에 남은 외돌토리 개차반이었다. 구부러져서 아름답던(?) 생, 세상은 넓어도 어떻게 빈줄러 앉을 자리 하나 없었다.

10년이 넘도록 남의 대소사를 돌보지 못한 죽음 앞에 문상객이라고 해봐야 고작 여나믄 사람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대다수는 술 한잔 제대로 마시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삼일장은 돈만 없애는 일이라는 남편의 말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그의 누이는 빈소를 지켰지만 스물이 훨씬 넘은 두 남매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아비의 부음을 접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리라. 예순이 넘은 하나 누이만 일삼아 통곡을 늘어놓았을 뿐 끝까지 자리를 지킨 동무들은 두 눈만 붉게 충혈 된 채 그의 생전을 헐뜯었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살다가 두건자리 하나 없는 이런 죽음은 또 처음이었다.

된서리 맞은 가을 풀잎처럼 진이 다한 그의 누이는 한사코 화장을 거부했다. 죽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는 게 그에게는 사치일 수밖에 없겠지만, 언제라도 남매들이 찾아와 절하며 아비를 용서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데에는 나도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 질기고 독한 천륜의 끄나풀이 어찌 이어지지 않겠는가.

풍수는 동네 공동묘지 외진 모퉁이에 어렵사리 터를 잡았고 눈동자가 충혈 되어 괴물 같은 사내들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달구를 했다. 죽음이 여의치 못했으니 달구소리란 것도 순 개판이었다.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어쩌구 하는 유행가와 육두문자만 날것으로 튀어나왔다. 저승사자처럼 버티고 앉아 간섭하는 늙은 누이를 간신히 달래 초라하지 않게 봉분을 만들었다. 시내에서 정육점을 하는 동무가 주머니를 털어 마련한 표석을 세우는 것으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예의를 다 했다. 평토제를 지낸 제수를 안주로 또 다시 폭음을 한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무릎 굻어 두 번 절하고 쓰펄, 쓰펄 욕하며 산을 내려왔다. 누구 하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끊임없이 하늘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예년에 비해 일찍 시작한 장마는 첫날부터 요절을 내려는 작정인지 집요하게 쏟아 붇는다. 나는 내일 삼우제에 가볼까 생각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 비에 그의 무덤 봉분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매장은 늘 이렇게 사람을 달뜨게 한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다가 문득 선산을 떠올렸고 갑자기 비장해진다.

고속도로가 가로질러 뚫리면서 쓸모가 없어진 선산 대부분을 아우가 복숭아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선산 전체를 샅샅이 훑어 쓸 만한 소나무를 찾아본다. 저수지 쪽으로 증조부 산소 근방에 풍채 좋은 솔밭이 보인다. 거기 어디쯤 소나무 몇 그루를 골라 수목장 터로 잡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담뱃불을 멀리 던져버린다. 소태처럼 입맛이 쓰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빗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개구리 울음소리가 와그르르 몰려온다. 나는 전등을 켜서 복숭아밭 끝에 있는 개울로 나가 본다. 개울에는 황토물이 동당발을 굴리며 콸콸 흘러간다. 언뜻 언뜻 터진 구름장 사이로 달이 드러나 보인다. 만월이다. 나처럼 누군가가 밭으로 나가는가,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달빛을 컹컹, 물어뜯는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