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6] 자유시, 그 참혹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7.07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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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제는 광적인 복수에 나선다. 역사에서 경신참변이라 부르는, 무고한 조선인에 대한 학살은 3~4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희생되었는지 그 규모는 지금껏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북간도 지역의 네 개 마을에서 3,664명이 죽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만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광란은 독립군 진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제와 지속적인 싸움을 해나가려면 새로운 준비와 정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있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등이 지도부를 이루었다. 여기에 통합된 독립군 부대는 12개, 총병력 3,500여 명이었다.

대한독립군 총대장 서일.
대한독립군 총대장 서일.

1921년 1월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독립군들은 아무르강 유역의 스보보드니 시에 집결했다. 스보보드니는 ‘자유로운’이라는 뜻으로 러시아 혁명군이 새롭게 지은 이름이어서 통상 자유시라고 불렀다. 자유시 집결의 궁극적 목적은 분산돼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러시아 적군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유시를 조선인들의 자치주로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자유시에는 대한독립군단만 있던 게 아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혁명에 참여하고 일제와 싸우던 또 다른 조선인 독립군부대가 있었다. 이만부대, 다반부대, 이항부대 등 대여섯 개의 무장부대 역시 자유시로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은 1918년 이동휘, 김립 등이 창건한 한인사회당이었고 그와 별개로 러시아 땅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과 오하묵 등이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를 설립한다. 이 두 파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라고 부르는데 이념적으로나 독립노선 상으로나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상해파가 임정에 참여하여 이동휘가 국무총리를 맡는 등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다면 이르쿠츠크파는 정통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하여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처음부터 러시아의 도움과 협력을 기대하고 왔기 때문에 두 개의 사회주의 계열 중 하나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문제는 그 주도권을 놓고 독립운동사 최대의 비극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두 개의 고려공산당 중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곳은 당연히 이르쿠츠크파였다. 처음에는 상해파가 주도권을 잡는 듯했으나, 러시아의 극동공화국은 조선인 군대를 통일한다는 명목으로 무장해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들로서는 무기를 손에서 놓는다는 것은 독립전쟁의 포기나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1921년 6월 28일 조선인 독립군 간에 동족상잔의 전투가 벌어지고 말았다. 전투라기보다는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은 이르쿠츠크파가 일방적으로 상해파를 학살한 사건이었다. 하루 종일 계속된 전투에서 독립군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600명이 넘었고 1,000여 명이 포로로 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주도권을 놓고 동지에게 총을 쏜 이 처참한 사건은 민족운동사 최대의 비극이었다.

레닌 정권을 우리의 독립운동에 이용하려 했던 상해파는 이후에 몰락을 거듭했고 이동휘도 시베리아를 떠돌다가 병들어 죽었다. 20년 동안 빛나는 투쟁을 전개했던 홍범도 장군 또한 끌려가서 중앙아시아를 떠돌다 고국에도, 독립투쟁의 터전이었던 북간도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대한독립군단 총재인 서일은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전개과정이 너무도 복잡하고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서 아직 역사적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추구했던 이동휘계의 고려공산당과 자신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러시아공산당과의 대립이었다. 그 후유증은 이후 우리나라 역사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대통합을 이루었던 독립군부대가 무너져버렸고 러시아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불신으로 독립운동 진영이 분열을 거듭했다. 멀리는 좌우대립, 한국전쟁까지 이 사건은 그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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