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5] 봉오동 아리랑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5] 봉오동 아리랑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7.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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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25회>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드는 마을, 가히 이상향이라고 할 이 마을 이름을 지은 이는 조선인이었다. 이름뿐 아니라 그는 사흘을 둘러보아야 한다는 일대의 광대한 면적을 모두 소유한 만주 제일의 부자였다. 일제와 싸운 최초의 대규모 전투이자 빛나는 승리의 기록인 봉오동 전투의 무대는 바로 그의 터전이었다. 근대사에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는 이 조선인의 삶에 대해 나는 그저 아리랑이라는 단어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독립운동 전선에서 여덟 개의 이름을 쓰며 헌신했던 이 조선인은 최운산이었다.

봉오동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의 초상.
봉오동전투의 숨은 영웅 최운산의 초상.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해 있고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친 장장 수십 리에 이르는 계곡 지대다. 물은 맑고 땅이 좋아 많은 조선인들이 꿈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 와서 사는 마을이었다. 여느 평화로운 시골마을과 다름없어 보이지만 마을 입구의 십자로는 연길, 도문, 훈춘으로 가는 길목이고 마을 뒷산은 양 갈래로 나뉘어져 러시아와 북만의 여러 지역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봉오동 일대를 장악한 최씨 일가는 과연 어떤 집안이었을까. 이 집안 이야기는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최운산의 아버지 최우삼이 고종의 명으로 연변 지역을 관리하는 ‘도태’직을 맡아 만주로 오면서 이 집안의 기막힌 아리랑이 시작된다. 뚜렷하게 주인이 없던 간도 일대와 이주해 있던 많은 조선인들을 관리하는 직분이었던 최우삼은 청나라 세력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기도 하는 등 강한 민족의식을 가진 이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봉오동 전투의 사령관 최진동이 첫째, 참모장 최운산이 둘째, 역시 전투에 참여했던 최치흥이 셋째였다. 둘째인 최운산은 1885년 생으로 청나라 군대에 입대하여 장작림 군벌에서 큰 공을 세우고 토지조사사업 때 엄청난 땅을 불하받았다. 이십대에 이미 대지주로 성냥공장, 비누공장, 제면공장, 콩기름공장, 제병공장, 제주공장 등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했다. 대규모 축산과 곡물상 등으로 무역업까지 하며 만주 제일의 거부가 된 최운산은 1910년대부터 자신의 재산을 대규모 독립군부대 운영과 무장독립운동의 군자금으로 투입한다.

독립군들이 사용한 소련제 기관총.
독립군들이 사용한 소련제 기관총.

봉오동 전투의 주력은 최운산이 키운 670여 명의 독립군 부대가 주축이었다. 사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잘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세계 최강의 무기체계를 갖추었던 일제 군대와 화력으로 맞서서 승리한다는 것은 그에 맞먹는 화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홍범도나 김좌진은 만주에 갔을 때 신무기를 구입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화승총으로는 일제와 전투가 불가능했다. 독립군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화력, 그것은 최운산이 자신의 재산을 털어 마련한 것이었다. 그는 토지의 일부를 팔아 5만 원을 마련하여 무기를 구입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약 150억 원에 달한다. 1차 대전 이후 귀환하는 체코 병사들에게서 무기를 사들였는데 그들이 가진 개인 화기는 미국에서 만든 최신 무기들이었다. 소련에 건너가서 대량으로 무기를 구매하기도 했다. 봉오동에서 십여 년을 키운 부대와 강력한 자금력으로 구입한 무기들, 역사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이 최운산을 통해서 비로소 해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 만주에 여러 독립군부대가 봉오동에 모여 연합부대인 ‘북로독군부’를 창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무장투쟁에 필요한 장비와 피복, 식량을 최운산이 모두 책임진다는 약속이 있어 가능했다. 최운산의 헌신으로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봉오동 자체가 오래 준비된 독립투쟁의 요새였기에 그 안에 들어온 일본군은 독안에 든 쥐가 되었던 것이다.

최운산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7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만주 최고 부자는 모든 재산을 독립투쟁에 쏟아 부었고 후손들은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이제야 겨우 그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우리 독립투쟁사는 아직도 베일에 싸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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