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했던 삶, 여농 활동으로 꽃 피우다

이 사람ㅣ김순애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 입력 2019.06.23 18:52
  • 수정 2019.06.23 19:10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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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1973년 2월 13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틀 뒤인 15일에 서울로 애기 보러 갔어요. 서울로 식모 살러 간 거죠. 하도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학교 선생님이 애기 보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에 보내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동네 아줌마가 석 달만 애기 보면 기술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고 거기로 가자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맘을 바꿔 서울로 간 거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순애씨는 공부는커녕 끼니도 제대로 때우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5남매 중 맏딸. 아버지는 유독 맏딸을 미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도 마음 놓고 다니지 못했다. “제가 학교만 가면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엄마를 때리고 괴롭혔어요. 부모님 모두 배움이 짧아서 글자를 모르셨거든요. 엄마는 글자만큼은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와 싸워가면서 저를 학교에 보내려고 했죠.”

김씨는 아버지 눈을 피해 학교를 다녀야 했다. “엄마가 두부 장사를 했는데, 장날에는 아침 일찍 두부를 이고 10리길 되는 동강에 내려놓고 학교에 가야 했어요. 검정 고무신 신고 다녔을 땐데 겨울이면 어찌나 미끄러운지 새내끼를 신발에 감고 다녔어요. 학교 갈 생각에 새벽에 두부를 동강에 가져다 놓고 돌아오면 엄마가 아버지 몰래 가방을 가지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어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 보니 빠지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수업일수가 부족해서 졸업하기 힘들었는데 선생님 잘 만나서 졸업을 했어요.”

이렇게 받은 초등학교 졸업장으로 김씨는 46년 후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김씨는 올 3월에 목포 제일중고등학교 중등과정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다.

15살 어린아이의 식모살이는 쉽지 않았다. “기저귀를 삶다가 태웠어요. 주인한테 들키면 혼날까봐 탄 거는 버리고 누렇게 된 거는 하얗게 만들려고 몇 번을 삶고 또 삶았어요. 애 보면서 배도 어찌나 많이 곯았는지. 3개월 애 보면 기술 가르쳐 준다는 게 결국 1년을 애만 봤어요.” 1년 동안 애를 보고나서야 직장생활을 하게 됐다.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다. 양말을 만드는 일이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돼 일했다. “일 하는 양만큼 돈을 받는 거였어요. 저는 남한테 지는 게 싫어서 밤을 새워서도 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억척스런 성격의 김씨는 이때부터 삶에 자신감이 생겼다. 돈도 모으고, 또한 쓰기도 많이 썼다고 한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길가의 판잣집에서 살았어요. 친구 언니가 우리집을 보고는 ‘거지 집’ 아니냐고 할 정도였어요. 악착같이 번 돈 40만원을 엄마한테 드렸어요. 동네 안으로 집 사서 이사하라고.” 동네 한복판으로 이사를 하는 것은 김순애의 어릴 때부터 꿈이었다. 그 꿈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처녀가 서울에서 돈 많이 벌어서 엄마한테 큰집 사줬다’는 소문은 동강 면내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한다.

올해 초 3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전남 나주로 내려간 김순애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이 지난 16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올해 초 3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전남 나주로 내려간 김순애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이 지난 16일 본지와 인터뷰를 하던 중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결혼 그리고 …

김씨의 어머니는 한동네 사는 총각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인물도 좋고 어머니에게 잘하는 총각이었다. “추석에 내려왔는데 느닷없이 선을 보라고 하는 거예요. 신랑감은 나보다 8살 연상이었어요.” 신랑은 김씨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세련되고 예쁜 아가씨가 생활력도 강했으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랑감의 집안은 평소 김씨가 꿈꾸던 집안이었다.

“집 있고, 형제 많고, 쌀 많은 집에 시집가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딱 들어맞았어요. 신랑 형제는 8남매고 시어머니가 억척스러워서 광에 들어가니까 뒤주며 항아리에 쌀이 그득했어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고생스런 유년생활을 보낸 김씨는 다복하고 부유한 집안을 꿈꿨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우선 시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했다. 가난하고 불우한 집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선을 보고 1년 정도 지나서 결혼했는데, 반대한 결혼이다 보니 시어머니는 이틀이 멀다하고 술 취해서 들볶았어요. 남편도 술 먹고 다니고. 너무 힘들었죠. 남편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술만 먹으면 나가라고 구박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열심히 살아갔다. “저는 집에서 놀아본 적이 없어요. 임신 8개월부터 화장품 판매원으로 다녔어요. 시어머니가 못하게 해서 그만 뒀는데,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학교 조리사로 취직시켜 주셔서 음식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조리사는 8년 만에 그만뒀다. 제도가 바뀌어서 학교 조리사와 영양사는 자격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일이 전자제품 판매원이었다. “삼성전자 판매원을 했는데 판매실적이 남달랐어요. 전남지역에서 최우수상을 탈 정도로, 돈도 좀 벌었죠. 그런데 저는 식당이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장사하면 이혼하자고 하는 바람에 못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어렵게 남편의 승낙을 받아 동강 면소재지에 식당을 차리게 됐다. “어려서 친정엄마가 두부 장사를 해서 순두부집을 차렸어요. 하루에 콩 2되로 두부 한 판이나 두 판을 만드는데 2만원도 안 들어가요. 그런데 저녁 11시, 12시가 되면 몇 십만 원씩 버는 거예요.”

식당은 아주 잘됐다고 한다. “저녁 12시까지 가게 문을 열고 새벽 3~4시에 일어나 두부 만들면서 장사를 했어요. 돈 쓸 시간도 없고, 돈을 버니까 아까워서 쓰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신발도 다 떨어진 거 신고 다니고 속옷도 성한 게 없을 정도였어요.” 김씨는 2년 반 장사를 해서 1억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 그런데 남편이 속을 썩이는 바람에 가게를 접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와선 다시 할 일을 찾았다. “버섯 하는 곳에 가서 보고 3일 만에 버섯농사를 짓기로 결정했어요. 치매 걸린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더라고요. 집에 들어와서는 애들 결혼시키고 7,000만원 들여 축사를 사서 물려줬어요. 버섯재배사도 5,000만원 들여 짓고, 차도 사고 집도 짓고 하다 보니 빚이 1억3,000만원이 됐어요.”

그러나 어려서부터 산전수전 다 겪어본 김씨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빚은 버섯농사 3년 만에 다 갚았어요. 버섯 4동 농사를 짓는데 남들은 놉을 3~4명씩 얻어서 하는데 나는 다 혼자 했어요. 잠을 3~4시간 밖에 못자고 치매 걸린 시어머니 간병까지 해가면서 했죠.”

농민회는 삶의 희망

“학교에 조리사로 다닐 때 농민회 활동을 했어요. 양연모씨라고 나중에 나주시농민회장 하신 분인데 그분이 학교 육성회장이셨거든요. 학교에서 선생님들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상에 바나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수입과일 차려놨다고 바나나를 식당 바닥에 던져 버리는 거예요. 나는 수입인지 뭔지도 몰랐는데. 농민회 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이더라고요.” 

1980년대 농산물 수입개방이 본격화 될 즈음 바나나는 수입농산물의 상징이었다. 농민회의 바나나에 대한 반감은 대단했다. 양연모 회장의 모습은 초기 농민운동가들이 수입농산물에 대한 반감이 어땠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씨는 이를 계기로 농민회 활동을 시작했다. “나주여농을 창립한 형님이 동강면지회 만들어놓고 1년 만에 가버렸어요. 그 분이 나한테 빈 통장 주고 여농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원들 3~4명 하고 기금도 만들고 회원도 늘리고 해서 나주에서 제일 잘하는 동강지회를 만들었어요.”

이 당시 김씨는 생활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회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동강에서 식당을 할 때는 농민회 회원으로만 활동을 했어요. 바빠서 임원을 할 수 없었고요. 그래도 농민대회에는 빠지지 않고 갔어요. 서울대회 갈 때 그렇게 좋더라고요. 서울거리를 활보하고 다 내 땅처럼 눕기도 하고 그렇게 데모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장사가 잘됐지만 농민대회 날은 문 닫고 갔어요. 며칠 전부터 기다려질 정도로….”

김씨는 식당을 하게 되면서 동강면 회장을 그만 뒀으나 식당 폐업을 하고 다시 동강면 회장을 맡아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나주시 회장을 맡았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여농 회원 3명이 찾아와서 나주시 회장을 맡으라고 하고, 그래서 하게 됐어요. 시 회장도 참 열심히 했어요. 3년 시 회장하고 바로 도여농 회장을 했어요.” 이후 김씨는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 회장으로 4년 동안 일한 뒤 전여농 부회장 그리고 회장을 연이어 맡았다.

백남기를 만나다

2016년 1월 16일 김씨는 전여농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취임 전 해인 2015년 11월 14일 민중대회에서 경찰의 살인적 물대포로 한 농민이 쓰러졌다. 그날 밤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간 농민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백남기 농민이다.

김순애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서울대병원 앞 농성장으로 출근하면서 임기를 시작하게 됐다. “서울에 올라와 보니까 백남기 회장님은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계셨어요. 사실 저는 백남기 회장님을 몰랐어요. 같은 전남 사람이라도 만난 적이 없었죠. 그래도 우리가 백남기다, 라는 생각으로 백남기 회장님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었고 농성장을 지키고 기자회견을 했죠.”

2016년 2월 백남기 대책위는 전국 도보순례를 하기로 했다. 우리 농업을 지키려 했던 백남기 농민의 뜻과 국가권력의 폭력의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결정이었다. “저는 겁도 많고 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백남기 회장님을 뵙지 못했어요. 그런데 도보순례 하기 전에 한번 뵙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도보순례 하루 전날 김정렬 사무총장한테 백남기 회장님 뵈러가자 해서 중환자실에 올라갔죠. 의식 없이 누워계신 모습을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이후에 힘들 때 마다 회장님 모습이 떠올랐어요. 회장님을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고 투쟁했죠.”

김 회장은 다음날부터 시작한 도보순례를 3일 만에 포기했다. 걷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17일 일정 동안 입을 옷가지를 다 싸왔는데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서 진통제를 먹으면서까지 버텼지만 3일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순애 회장은 이후에도 백남기 투쟁에 끝까지 헌신했다. 결국 무도한 정권은 백남기 투쟁으로 시작된 민중저항의 불꽃이 촛불항쟁으로 이어지면서 무너졌다.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처음으로 벌어진 평화적 민중항쟁 촛불항쟁으로 정권을 무너뜨리는 역사의 한복판에 김 회장이 서 있었다.

새로운 배움의 시작

“저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남들이 내 겉모습을 보고 알아주지 않아도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두루 잘 했어요. 그래서 후회가 없어요.”

김씨는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경제적으로 기반을 세웠다. 자녀들도 잘 키웠으며, 사회적으로는 농민운동가로서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일에 앞장섰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으로 있으면서 여성농민운동의 오랜 과제였던 여성농민전담부서 설치에도 가시적 성과를 냈다. 더불어 정부가 여성친화형 농기계 개발에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3년의 전여농 회장 임기를 마치고 내려온 김 회장은 다시 새로운 일을 찾았다. 그것은 어려서 하지 못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올 3월에 중학교 과정에 들어갔어요.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요. 영어도 배우고 있어요.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칠판에 써놓고 애들한테 내가 학교에서 배운 거다 하면서 자랑해요. 그리고 손녀가 오면 부러 상을 펴놓고 같이 공부하는데 손녀가 우리할머니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많이 한다고 너무 좋아해요.” 김씨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수시로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나 공부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에 미소가 가득 지어졌다.

“전여농 회장하면서 발언할 때 영어가 나오면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회장하면서 실무자들한테 부탁한 것이 다른 건 몰라도 영어는 한글로 읽을 수 있게 써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서 속상할 때가 많았어요”라며 배우지 못해 겪어야 했던 수모를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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