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참깨농사의 비밀

  • 입력 2019.06.23 18:45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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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팥 없는 살림은 되어도 콩 없는 살림은 안 된다 하고, 깨 없는 살림은 살아도 고춧가루 없이는 못 산다고 어른들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식생활에서 콩이나 고춧가루의 비중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더라도 팥에 깨를 빗대는 것은 좀 과하다 싶습니다. 떡이나 죽 등의 특별식에 쓰이는 정도의 팥과 온갖 반찬에 다 들어가는 참기름과는 애당초 비교할 바가 못 되니까요.

생각해보면 300여 가지가 넘는 나물을 먹는 우리민족의 지혜는 참기름과 깨소금의 공으로 돌려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 자라면 독초가 되는 풀도 어린 시절에는 나물로 둔갑하고, 잎이 세지면 못 먹게 되는 풀들도 야들야들 부드러울 때면 못 잊을 추억의 나물이 되곤 하니까요.

독이 없는 무맛의 풀을 데쳐서 간을 하고서 비장의 양념인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기막힌 맛으로 재탄생을 하니 이른바 나물공화국이라 불러도 별스럽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나이 드신 어른들이 계시는 집안이라면 한 뼘의 땅에라도 깨를 심습니다. 값싼 수입깨로 짠 참기름과 비교할 바가 못 되는 내손 표 참기름 맛을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곳 남해의 여인들은 밭마늘을 뺄 때 참깨 씨앗을 뿌려서 깨농사를 짓습니다. 그 어떤 방법보다 발아율이 높다며 순전히 깨농사를 위해 밭마늘을 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 자리에 한 포기의 깻대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의 노력이 들어가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깨농사에서는 파종법이 더 선호되는 지라 복잡한 과정이 따릅니다. 깨씨가 작으니 깨순도 작고 여리지요.

그런 깨모종은 거세미나방 애벌레가 제일 좋아하는 먹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벌레한테 뺏기는 분량까지 계산해서 여러 포기를 키워야 하는 것이지요. 깨모종이 혼자서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때까지 적어도 세 번 정도 솎아줘야 비로소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깨를 솎을 때면 쪼그리고 앉거나 허리를 구부린 채로 일을 합니다. 작업방석에 앉지도 못 하는 것이지요. 농사일 중 노동 강도가 가장 센 자세가 바로 쪼그려 앉기와 허리 굽혀 일하기이지요. 잠시는 몰라도 그 자세로 몇 시간 일하는 것은 거의 묘기대행진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글쎄 여성농민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마네요. 무릎이나 허리가 아파 수시로 병원을 가면서도 포기한지 않는 참깨농사, 참기름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는 어려움을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들의 수고로움으로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것을 사고파는 첨단 자본의 시대에도 사지도 팔지도 않는 것들이 많이 있지요. 상품이 되지 않는 것들의 상당수는 여성들의 노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들지만 기꺼이 감당하면서도 주장하지 않는 묵묵함이 세상의 한 켠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지요.

거기에 여성농민들도 있습니다. 수천 년 전통의 나물문화를 이어갈 비장의 무기가 바로 참깨이고 그 농사를 기꺼이 감당해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혹 길을 가다가 낯모르는 여성농민이 깨밭을 손보고 있다면 겉으로든 속으로든 고마움을 표현해 주시라고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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