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4] 단동의 비밀 요새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6.23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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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삼일항쟁의 열기가 아직 뜨겁던 4월 11일, 상해에 임시정부가 섰다. 항쟁의 여세를 몰아 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국내외에서 임정 수립운동으로 나타났으니, 그 중에도 상해에서 조직된 임정이 가장 근간을 갖춘 것이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칭한 것도 상해 임정이었다.

조선에서 상해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다음 일제의 눈을 피해 압록강 철교를 건너 단동에 도착한 후 몇날 며칠 기차를 타거나 일주일여 배를 타고 가는 길이 있었다. 당시에 안동이라 부리던 지금의 단동은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중국 땅이자 넓은 압록강 줄기가 곧장 서해로 빠지는 길목이어서 해운이 발달해 있었다. 육지와 해상을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를 피해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단동에 있던 이륭양행 건물.
단동에 있던 이륭양행 건물.

하지만 단동에는 강력한 기지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이륭양행이었다. 영국인이 소유한 해양운수업체인 이륭양행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상해까지 무사히 실어 나르는 중차대한 역할을 한 숨은 독립운동의 요새였다. 실제로 임정에서 아주 중요한 부서였던, 식민지 조국과의 연락과 자금 모집, 인물의 왕래 등을 맡았던 교통국은 이륭양행 2층에 터를 잡고 있었다. 교통국에서는 한글활자, 한국지도, 무기, 탄약 등을 꾸준히 임시정부에 보냈는데 이러한 모든 활동의 중심이 이륭양행이었던 것이다.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영국인 조지 쇼가 그 회사의 주인이었다.

일본인 어머니를 둔 쇼는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일찌감치 동양에 왔고 스무살 때인 1900년에는 조선의 금광에서 회계 일을 보기도 했다. 그는 강렬한 반일감정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아일랜드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독립운동에 호감을 갖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백범일지에는 이륭양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구를 비롯한 15명의 동지가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황해를 지나갈 때 일본 경비선이 나팔을 불고 따라오며 배를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인 선장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전속력으로 경비구역을 지나 4일 후 무사히 상하이에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가진, 이광수, 박헌영, 김단야, 김산 등 국내와 상하이를 오고 갔던 독립운동가들 중 이륭양행 소유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 조지 루이스 쇼.
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 조지 루이스 쇼.

임시정부뿐 아니라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해서도 그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3년, 의열단이 비밀리에 200개의 폭탄을 상하이에서 한국에 들여올 때, 이륭양행 소유의 기선에 의류품 화물상자에 넣어 이륭양행 앞으로 보냈고 쇼는 직접 상하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면서도 한 푼도 받지 않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의열단원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단동에 있는 그의 집에 숨기도 하였다. 이륭양행이 일본영사관의 경찰권이 미치지 못했던 치외법권지역이었던 점을 활용해서 적극 지원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이륭양행을 임시정부와 국내, 만주지역을 연결해주는 안전통로이자 독립운동단체들의 요새, 혹은 국내전진기지로서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륭양행은 일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일제에 의해 옥고까지 치른 쇼는 상해 임정에서 주는 금색공로장을 받을 정도로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그에 따른 일제의 탄압도 더욱 간교해져서 결국 그는 단동에서의 사업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1938년에 단동을 떠나게 된다. 무려 30여 년에 걸친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과 단동의 비밀 요새도 쇼가 떠남으로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어머니도, 아내도, 며느리도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럼에도 일제에 저항하는 정신이 투철했던 진정한 세계인이었다. 1964년 조지 쇼에게 건국 훈장이 수여되었으나 후손을 찾지 못하다가 2012년에 극적으로 손녀를 찾아 훈장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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