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원의 농사일기 76] 간벌

  • 입력 2019.06.23 18:00
  • 기자명 윤석원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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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0여 그루의 알프스 오토메는 4년차에 꽃이 말라 떨어지는 냉해를 입었다. 한 동안 피해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으나 주위 농민들의 격려로 남은 기간 내년을 위해 나무들을 잘 돌보고 관리해 주기로 작정했다.

열매를 키워야 했던 나무는 갑자기 열매가 거의 모두 없어졌으니 나보다 더 실망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무는 열매를 키우기 위해 지난해부터 축적해 놓았던 양분을 쓸 곳이 없어져 버렸으니 나뭇잎이나 키우려(영양생장) 하진 않을지 걱정이 크다. 내년을 위해 지금부터 나무를 돌보고 농사를 준비하는 일이 기술적으로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영양제 공급은 거의 하지 않고 수세를 떨어뜨리기 위해 가지유인도 해주고 있다.

이런 저런 작업을 하다가 문득 나무 사이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식재배라 나무사이의 간격은 1.5m로 좁게 식재됐다. 그런데 나무들이 자라면서 지나다니지 못할 정도로 빽빽해졌다. 정지·전정 작업 등을 통해 작은 면적에서 나무가 최대한 열매를 맺도록 유도하는 것이 밀식재배의 기본원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무가 자라면서 너무 좁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올해는 열매도 거의 없으니 잘됐다싶어 한 그루 건너 한 그루씩 간벌을 해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4년여를 정성껏 키운 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지난주에 드디어 용단을 내려 톱으로 베어 냈다. 식물들도 감정이 있어 즐거움과 공포감을 느낀다는데 너무나 미안했다.

하지만 살아 남은 나무들은 이전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햇볕도 더 많이 쬘 수 있고, 시원한 바람도 잘 통하며, 무엇보다 가지를 사방으로 넓게 뻗칠 수 있을 것이고, 꽃눈도 튼실해질 것이다.

사실 밀식재배는 식물이 맘 놓고 생육하고 열매 맺게 하는 환경 친화적인 재배법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병충해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방제횟수도 늘려야 하고 인위적인 영양공급도 충분히 해줘야 한다. 간벌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밀식재배와 다름없으니 생육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자연 환경에 순응해 나무 스스로 면역력을 키우게 하고 적정한 양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순리에 맞는 농사가 아닐까. 인간의 욕심을 버려야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한 친환경 농업이 되지 않을까. 나는 아직 엄두도 못 내지만 꼭 실천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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