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 농사 잘 지어갖고 거지돼야 부렀어”

  • 입력 2019.06.16 18:05
  • 수정 2019.06.17 09:46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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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떼기로 넘긴 양파밭에서 비닐을 걷어내던 김기탁씨가 그 자리에 앉아 한 숨을 돌리던 중 흐르는 땀을 닦고 있다. 김씨는 “후작을 하면 뭘 해. 팔아먹을 게 없는데”라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놨다.
밭떼기로 넘긴 양파밭에서 비닐을 걷어내던 김기탁씨가 그 자리에 앉아 한 숨을 돌리던 중 흐르는 땀을 닦고 있다. 김씨는 “후작을 하면 뭘 해. 팔아먹을 게 없는데”라며 답답한 속내를 털어놨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양파 줄기를 잘라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양파 줄기를 잘라내고 있다.

[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양파 수확이 끝난 비탈진 밭에서 한 농민이 비닐을 갈무리하고 있다. 비닐을 뒤덮고 있던 황토빛 먼지가 바람에 풀썩인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고랑엔 주변 지인들과 나눠 먹을 양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먼지 범벅이던 비닐을 걷어 옆에 두고 밭에 털썩 앉아 담뱃불을 붙인다. 내뿜는 게 연기인지 한숨인지 모를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다. 이윽고 말을 뗐다. “허 참, 양파 농사 잘 지어갖고 거지돼야 부렀어.”

중만생종 양파 수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난 11일 전남 무안군 현경면 들녘을 찾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파주산지답게 드넓게 이어진 들녘 곳곳에선 양파를 캐고 줄기를 자르고 망에 담는 작업들이 한창 이뤄지고 있었다. 해안을 끼고 펼쳐진 들녘 위로 양파를 담은 붉은 망들이 한껏 도드라져 보였다.

현경면 수양리에서 만난 김기탁(58)씨는 밭떼기(포전거래)로 넘긴 양파밭에서 비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미 상인은 4,000평의 밭에서 양파를 걷어간 뒤였다. 굳은 표정의 김씨가 말했다. “뭔 말을 하겠어요. 생산비도 안 나오는 값을 받아갖고….”

작년에 한 마지기(200평)당 200만원을 받던 밭은 올해 절반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마저도 조생양파 폐기 직후 가격이 오르던 때였다. 그 잠깐의 시기 이후 무안 들녘을 찾던 상인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김씨는 이어 말했다. “들어간 돈이 100만원이면 소득이 70만원이요. 한 마지기당 30만원씩 밑 까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겄소.” 말이 끊기고 그가 내뿜은 담배 연기 속에서 한숨이 진하게 묻어 나왔다.

망 작업의 달인으로 통하는 여성농민들이 양파를 크기별로 나눠 망에 담고 있다.
망 작업의 달인으로 통하는 여성농민들이 양파를 크기별로 나눠 망에 담고 있다.

인근의 윤석재(73)씨 밭에서도 상인들이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 10여명이 양파 줄기를 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방인인 기자의 눈에도 양파는 굵고 묵직해 보였다. 윤씨는 한 쪽 밭에서 가족이 먹을 양파를 수확하고 있었다. 윤씨 또한 상인에게 밭떼기로 양파를 넘겼다. 평당 7,000원, 한 마지기당 140만원을 받았다.

윤씨는 “작년에 비해 가격이 너무 떨어졌소. 그래도 우리는 잘 판 편”이라며 말을 아꼈다. 주변엔 평당 3,500원 즉, 한 마지기당 70만원이라는 헐값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밭을 넘긴 농민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농사에 들인 공력만 60여년, 윤씨는 “가격이 떨어질 때는 몇 번씩 있었지만 금년 같은 경우는 없었다. 양파 말고는 할 것이 없으니 더 큰 문제”라며 “이럴 때 정부에서 신경 좀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상열(76)씨 상황도 윤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년에 상인에게 240만원에 넘긴 밭은 딱 100만원이 떨어져 거래됐다. 한 마지기당 140만원. 김씨의 경우처럼 조생양파 폐기 직후에 거래돼 그 정도였다.

안씨는 “캐고 자르고 담는 등 작업대행을 맡기면 망당 3,000~4,000원씩 받는다. 값도 없고 운반할 차도 없는데다 작업도 힘들어 상인에게 모두 넘겼다”며 “평생에 이렇게 안 좋을 때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못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며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수확기 수급대책 및 가격 지지를 위해 정부는 지방자치단체와 농협을 통해 산지폐기를 진행했다. 현경면에서도 산지폐기를 진행한 밭마다 해당 면적을 알리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3차까지 진행된 산지폐기 면적이 농민들의 희망 면적보다 적어 밭 일부는 폐기하고 밭 일부에선 양파를 수확하는 장면도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갈아엎은 고랑과 멀쩡한 고랑 사이에 앉아 양파를 수확하는 설덕림(62)씨가 그러했다. 농협과 8,000원(한 망 기준)에 계약재배를 진행한 설씨는 밭 600평 중 절반은 산지폐기로 갈아엎고 나머지 밭에서 양파를 캐고 있었다. 설씨는 “한 망 당 최소 만원씩은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안 되니 속상할 뿐”이라며 “정말 농민들은 하나가 아쉽소. 제발 값 좀 올려달라고 써 주소”라고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농민들의 고충과 원성을 현장에서 직접 듣고 있는 전남서남부채소농협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가격이 워낙 떨어지니 수급대책이나 산지폐기 면적·시기에 대한 농민들의 날선 불만이 곧장 농협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지폐기가 진행돼 밭 일부를 갈아엎은 가운데 설덕림씨가 양파를 수확하고 있다.
산지폐기가 진행돼 밭 일부를 갈아엎은 가운데 설덕림씨가 양파를 수확하고 있다.

양파 수매 시작을 하루 앞두고 사무실에서 만난 김청필 과장은 “농협에서 3차까지 진행한 산지폐기 면적은 약 12만평이고 현재 4차 산지폐기 신청을 받고 있다”면서도 “70~80% 농가에서 (양파 수확을 위한) 작업비가 들어간 상태라 4차의 진행여부는 아직 미지수”라고 말했다. 이어 “농민들께서 폐기하면 시세가 올라가냐고 묻고 그럼 시원하게 (폐기)하겠다고 하실 때마다 그저 동참해달라는 말밖에 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무안지역의 양파 수매는 오는 23일 전후로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중만생종 양파의 본격 출하가 시작된 것이다. 양파 가격이 4,000원대까지 하락했던 5년 전 무안의 마을마다 그리고 도로 곳곳에 팔지 못한 채 쌓여 있던 ‘양파산성’의 가슴 아픈 현실을 재현하지 않으려면 정부는 제대로 된 수급대책을 하루 속히 시행해야 한다.

쇠귀에 경 읽기일지라도 “국민소득 2만불 3만불이 넘는 나라에서 농업을 이렇게 홀대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라는 한 농민의 절규 섞인 말도 꼭 곱씹길 바라며….

여성농민들이 양파를 캐내고 있다.
여성농민들이 양파를 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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