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다방 DJ⑥ “그 음악은 제발 틀지 마세요, 디제이”

  • 입력 2019.06.1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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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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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다방 DJ 김동욱 씨의 경험에 의하면, 다방에서 듣고 싶은 노래를 디스크자키에게 신청할 때 보면,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원어로 정확히 적어낸 사람은 3분의 1도 안 되었다. 어디선가 들은 기억은 있어서 입에서는 뱅뱅 도는데 그것을 글자로 바르게 적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더 복서(The Boxer)’라는 노래를 신청할 때 노래 제목은 어렵지 않게 쓰는데 가수 이름(Simon & Garfunkel)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로 다탁을 사이에 두고 친구랑 혹은 연인이랑 티격태격하기 일쑤예요. 사이먼에 에이(a)가 안 들어가면 그게 무슨 사이먼이냐 시몬이지, 가펑클에서 알(r)을 빼야 한다, 아니 이(e)를 빼야 한다 어쩌고저쩌고…. 그러다 결국 한글로 대충 적어서 내지요. 그래도 그 정도면 양반이에요. 라디오 심야프로에서 얼핏 듣고 기억해뒀다가 한글로 써내는 경우, 한참 동안 추리를 해야 누구의 무슨 곡인지 간신히 어림할 수 있다니까요. 그렇더라도 방송으로 소개할 때 흉보는 멘트를 하면 안 돼요. 상처 받거든요.”

그게 뭐 상처 받을 일일까? 설령 우리나라 가수 이름이라 할지라도 영식이를 용식이라 잘 못 적을 수도 있고, 병철이를 봉철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터, 물 건너 서양 나라의 가수 이름이나 노래 제목을 어찌 철자 하나까지 딱 맞게 쓰겠는가?

하기야 ‘꿈에 본 내 고향’이나 ‘고향의 강’ 같은 근사한 우리 노래 다 놔두고, ‘컨트리 로드(Country Road)’ 어쩌고 하는 서양 노래를 그 의미도 잘 모르는 채, 한글발음에 최적화 된 혀를 혹사시켜 가면서 기를 쓰고 흉내 냈던 것 자체가, 크고 힘 센 나라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일말의 동경 혹은 사대 의식(?)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겠지만.

12월 24일이 다가오면 다방 디스크자키들도 나름대로 대목 준비를 해야 했다. 그날은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때문에 밤을 새가며 뮤직박스를 지켜야 했는데,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캐럴 음반들을 사전에 구색 갖추어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4일 저녁에 교대해서 뮤직박스에 들어갔다 하면 새벽 4시 즈음이 되어야 파하거든요. 25일 아침에 일을 마치고 거리로 나서면 실버 벨이니, 징글 벨이니, 화이트 크리스마스…따위의 캐럴송 가락이 하루 종일 귓속에서 웅웅거릴 지경이에요. 같은 노래를 밤새도록 이 사람 저 사람이 중복해서 신청을 하니까요. 물론 크리스마스 말고도 같은 노래를 겹치기로 신청하는 시기가 또 있기는 하지요.”

김동욱 씨가 말하는 ‘겹치기 신청곡’의 사례를 하나 더 꼽으라면 단연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즈음이다. 주로 여자고등학생 여럿이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음악다방을 찾는 경우였는데, 그렇다고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로 시작되는 ‘촌스런’ 노래를 신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1970년대 초·중반이 되면, 선생님과 함께 음악다방에 몰려온 여학생들이 거의 지정곡처럼 주문하는 노래가 있었다.

-이번에는 3학년 3반 김선희 양 등 일곱 명의 여고생들이 졸업을 며칠 앞두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듣고 싶다고 청하셨군요. ‘언제나 마음은 태양’의 주제곡, 함께 감상하시겠습니다.

1960년대 말(혹은 70년대 초)에 한국에서도 개봉했던, 시드니 포이티어(여학교 담임교사 역) 주연의 이 영화는 원제가 ‘투 써 위드 러브(To Sir With Love)’였는데, 영국의 유명 가수 룰루(Lulu)가 부른 주제곡이 영화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그 시절 다방의 디스크자키에게는 손님들에게 걸려온 전화를 바꿔 주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실내에 김말똥 씨 계십니까? 카운터에 전화 와 있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큰 다방의 경우 다방 안 한쪽에 전화 받는 부스를 따로 설치해두기도 했다. 지금이야 그 시절의 다방 전화기들이 모두 개개인의 손전화로 ‘분리 독립’하였고, 다방 뮤직박스의 음반에 수록된 노래의 수백 배도 넘는 곡들을 각자의 스마트폰 하나에 우겨넣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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