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3] 항쟁의 이모저모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6.16 18:2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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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어떤 이는 우리 근대사를 죽음의 연대기라고 표현했다. 저 갑오년에 스러진 삼십만 백성과 이어진 의병투쟁으로 고혼이 된 수만 여, 삼일대항쟁으로 죽어간 팔천에 가까운 이들은 모두 같은 시대라 할 이십오 년 남짓한 세월 속 우리 조상들이었다. 일제와 싸우다 죽고 해방 후 전쟁으로 죽은 그 엄청난 수의 민인들을 생각하면 죽음의 연대기라는 말이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삼일대항쟁을 이야기할 때마다 마치 통과의례이기나 한 것처럼 먼저 거론되는 문제가 민족대표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이끄는 것이 언제나 민인들의 힘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선각자나 영웅을 고대하는 마음 또한 떨치기 어렵다. 오래도록 피지배자로 살면서 유전자에 새겨진 심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그 속에서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고 떠오를 것은 떠오르게 한다. 그 물속에 비쳐보면, 소위 민족대표 33인이라는 고유명사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고 한계도 있다. 일방적인 찬양도, 무조건적 폄하도 옳지 않다. 주로 종교지도자였던 그들은 당대에 민인들을 대표한다는 생각도 있었고(정당이나 결사체가 없던 시절에 각 종교 외에 마땅히 있을 게 없었다), 실제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물론 유림이나 천주교를 대표하는 이들이 없었던 점이나 애초부터 민인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점은 매우 아쉽다. 처음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겠다던 계획은 급하게 수정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모여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일급 요리집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신 다음 기다리고 있던 경찰차에 실려 갔다. 심지어 그들은 독립선언서조차 낭독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수를 했던 것인데, 그들을 굳이 이해하자면 대부분 비폭력과 살생을 금하는 종교지도자였기 때문에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는 것만큼은 막고자 했다는 것이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찍었던 목판.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찍었던 목판.

어찌 되었든 민족대표라는 이들이 보인 행태는 여러 모로 안타까웠으나, 이후에 민인들이 주체로 나선 항거는 과연 전민항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수백에서 수천 명씩 모인 사람들 중에 손에 태극기를 들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어떤 이들이 목판으로 태극기를 찍어 나누어주기 시작한 게 3월 5일부터였다. 두 손을 들어 목청껏 만세만 부르던 이들의 손에 태극기가 주어지자 그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갑자기 태극기는 민족과 독립의 상징이 되었고 그 깃발 아래 목숨을 바쳐도 좋을 신앙이 되었다.

최초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최초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태극기뿐만이 아니었다. 항쟁 초기부터 정세와 투쟁 소식을 알리는 지하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하여 그 숫자가 무려 29종에 이르렀다. 지하신문의 등장은 예나 지금이나 여론을 호도하고 거짓 보도를 일삼는 기존 언론에 대한 불만이 배경이었다.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같은 친일신문들은 항쟁에 대해 연일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경고문을 실었다.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오판하지 말라거나 시위에 나서는 사람을 가차없이 처벌할 것이라는 협박식 보도였다. 여기에 윤치호, 이완용 등의 친일인사들이 나서 조선이 살 길은 일본에 순종하는 길뿐이라는 궤변을 신문에 늘어놓았다. 지하신문들은 열악한 제작 여건 속에서도 민인들의 시위를 알리고 투쟁을 고무하는 역할을 해냈고 이후 독립투쟁 과정에서 신문의 중요성이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3월 중순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간 항쟁은 주로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을 기해 대규모로 일어났다. 일제는 시위 차단에 열을 올렸으나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를 막을 길이 없었다. 면 단위에서 수천 명이 모여 시위를 하는 경우도 흔했다. 일제는 오히려 지방의 시위를 더 두려워했고 탄압 또한 가혹했다. 태화관의 대표 중 가장 높은 형이 3년이었던 데 반해 지역의 지도자 중에는 무려 15년 형을 받은 이도 있었다. 항쟁에 앞장섰던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살기가 어려워 대거 망명을 떠났고 그들은 독립운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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