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성평등한 농촌건설이 시급하다

  • 입력 2019.06.16 18:13
  • 기자명 오순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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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이 정책위원장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

불 때는 부지깽이도 한몫 거든다는 바쁜 농번기다. 새벽부터 일꾼들의 새참 챙기느라 눈곱 뗄 새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여성농민들의 이야기를 하려한다.

얼마 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농민농업의 시대가 온다’는 토론회가 열렸다. 네덜란드의 와게닝겐대학 플루흐 교수는 ‘21세기 농민층과 농민농업의 의미’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경영자형 농업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농민농업(가족농 포함)의 부활을 통해 지속가능한 농촌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경영자형 농업(기업농)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표현했다.

10년 전만 해도 46마력짜리 트랙터면 충분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정부의 대규모 기업농 육성정책과 개방농정에 따른 농산물값 폭락과 수지를 맞추기 위해 규모를 늘려가려는 농민들의 생존전략이 맞물려 소수의 대농들에게 농지가 집중됐다. 농촌에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대농들은 단기간에 일을 끝내기위해 100마력짜리 트랙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농민들의 농가부채를 가중시키고 정부의 정책자금은 기계를 팔아먹는 기업들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환농법이나 다양한 농작물 재배보다는 돈벌이 되는 농사에만 치우치다보니 수급조절이 조금만 안 돼도 농산물값이 폭락하는 사태가 거듭되고 있다.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 하는 얘기는 옛말이 됐고, 신규로 농촌에 들어와 정착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비아캄페시나를 중심으로 가족농을 포함한 농민농업의 시대를 만들어야 농촌사회가 지속가능하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자본의 힘이 아니라, 토지와 노동에 기반한 실제 일하는 농민과 가족농 육성만이 농민 스스로 자립하고 생태환경을 보전해가면서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직불제 개편 논의나 농민수당 논의도 그간의 기업농위주의 정책이 면단위 인구소멸위기를 초래했다고 판단하고 중·소농에 대한 지원정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논의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농촌을 유지시켜 나가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똑바로 보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농민들이 생산하는 공익적 기능은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하다. 가사노동에 논, 밭일, 농산물 2차 가공, 마을 대소사 챙기기, 마을경제사업, 면단위 행사에 음식봉사, 육아 및 노인 돌봄, 농외소득, 집안 시제 및 벌초, 동네주변 풀베기작업이나 청소작업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다. 언제까지 여성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농촌사회를 유지할 수는 없다.

미투운동의 확산으로 우리사회의 인권의식과 성평등교육에 대한 요구도 늘고 있다. 교육부, 보건복지부 등 7개 부처에 4급 직급인 성평등담당정책관 제도가 신설되고 외부공채를 한다고 한다. 30년간 여성농민회는 가부장적인 농촌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여성농민전담부서 설치를 요구했고, 농식품부는 올해 6월 ‘농촌여성정책팀’ 구성을 입법 공고했다. 애초에 4급인 과장급을 요구했지만 과 신설은 어렵다고 들었는데, 타 부서는 4급 과장을 뽑는다고 하니 문재인 정부의 농업 홀대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농촌사회가 아직까진 씨족사회 구성원이 많고, 지역 선후배로 다 연결돼 있어서 여성들이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주변의 옹호나 문화 때문에 한번쯤 그럴 수 있다고 보고, 오히려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이 지역을 떠나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받는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들이 많아 가정폭력의 문제도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요즘은 다문화가정이 늘면서 가정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역이 좁은데다 혈연, 지연관계가 얽혀 있어 이를 사회문제화 하기 힘든 구조에 있다. 오히려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을 불편해하면서 역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여성농민들은 농민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구조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생산자로서의 직업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하고,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여성으로서 차별 또한 받고 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면단위 영농교육에서부터 성평등 교육을 하자고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공동경영주 인정, 복수조합원 가입 등 눈물겨운 투쟁 속에서 직업적 지위에 대한 보장 정책이 하나씩 수립돼 왔다. 하지만 초기의 농민수당 논의과정에서 여성농민들에 대한 직업적 지위 인정이 되지 않아 끊임없는 투쟁 속에 최근에야 공론화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농민 전담부서가 생겨나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성평등한 농촌을 만드는 일이 젊은 여성들을 유입할 수 있는 해결책이며,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을 행정관료들이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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