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삭발, 농성

  • 입력 2019.06.09 19:22
  • 수정 2019.06.09 19:35
  • 기자명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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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

여성농민들의 투쟁사를 쓰려다보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번 이야기는 쌀을 둘러싼 여성농민들의 투쟁 중에 대표적인 두 개의 투쟁을 소개하려고 한다. 여성농민들의 투쟁을 살펴보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야기를 담은 <밥.꽃.양> 다큐가 떠오르는 이유는 왜 일까?

1998년 여름, ‘투쟁의 꽃’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했던 현대자동차 식당노동자들. 그러나 노사 협상이 타결되자 전원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고, 노조의 하청노동자가 되었어도 원직복직이 되지 않았고, 다시 투쟁에 나서야 했던, ‘밥꽃양’은 말한다. 그들을 위해 밥을 지어먹였고, 투쟁의 꽃이었고, 그러나 비정규직 여성(양)이라는 이름의 여성노동자.

여성농민이라고 뭐가 다를까? 열심히 투쟁했지만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보상으로 ‘농민수당’이 실시되었지만 농가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현실. 쌀값을 위해, 농업개혁을 위해, 마을과 가정의 대소사를 책임졌던 여성농민, 그녀들이 벌였던 <쌀, 삭발, 농성>이라는 투쟁 얘기를 소개한다.

목숨 걸고 쇠창살에 매달린 여성농민들

쌀은 생명줄, 여성농민들은 조직을 만든 이후 지금까지 쌀 투쟁을 중요한 투쟁의 하나로 여기고 줄기차게 농민들과 공동투쟁을 전개해 왔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창립 이후 현재까지 쌀 투쟁은 중요한 투쟁의 하나이다. 1989년 전국여성농민운동 조직이 만들어진 이후 쌀값 제값받기를 위한 전여농의 투쟁은 이후 쌀 자급실현, 대북지원, 학교급식, 직불제 실현, 식량주권 문제로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일상적인 쌀 투쟁과 달리 여성농민운동에서 2개의 쌀 투쟁은 여성농민운동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투쟁으로 일획을 긋고 있다. 1992년 11월 10일 전량수매와 학교급식 완전실현을 위한 1992 전국여성농민대회를 시작으로 1993년 11월 12일 우리쌀 지키기 1993 전국여성농민대회, 1995년 12월 17일 쌀 자급실현을 위한 국회의원 쌀 전달식, 1998년부터 직불제 투쟁을 하다가 급기야 2001년 10월 12일부터 23일까지 농협중앙회의 반농민적 행태에 대한 사과와 쌀 대책 촉구를 위한 전여농 농성(12박13일)이 시행되었다. 여성농민운동이 독자적인 대중집회 이외에 전국적 규모의 장기적인 농성투쟁을 실시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2001년 정부는 농협을 통해 400만석을 추가 수매하기로 결정하고 추곡수매가 대신 시가매입제도를 적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시가매입제도란 농협이 정부로부터 3% 저리 융자를 받아 벼를 시중가격으로 매입하여 다시 시중가격으로 파는 제도이다. 따라서 농협은 자신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쌀 수매가격을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었고 결국 쌀값 폭락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2001년 10월 농협의 반농민적 행태에 대한 사과와 쌀 대책을 촉구하며 농협중앙회에서 농성중인 여성농민들.
2001년 10월 농협의 반농민적 행태에 대한 사과와 쌀 대책을 촉구하며 농협중앙회에서 농성중인 여성농민들.

이에 10월 12일 전남연합 소속 여성농민 9명이 농협중앙회를 항의 방문하였다. 그러나 농협중앙회장은 여성농민들을 무시하고 4일째가 되도록 면담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청원경찰들은 1층 로비부터 이들을 저지했고, 나중에 도착한 경남의 여성농민 2명과 함께 셔터 안팎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불도, 먹을 것도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농성투쟁은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었다.

급기야 농성 4일째인 15일 아침 8시 30분경. 나흘 동안 굳게 닫힌 셔터문 안에 가로막혀 건물 로비와 정문 앞으로 나눠 농성을 벌이던 여성농민들과 농협 용역경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나주시 봉황면지회 박복실(50) 회장이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실려 갔다. 연로한 70대 회장들은 이미 탈진해 병원으로 옮긴 상태였고 분노한 전남 여성농민들 중 이연옥(35) 전남연합 사무국장, 주향득(40) 부회장, 나애경(34) 교육부장 세 명은 구호를 쓴 쌀 포대를 뒤집어쓰고 농협 쇠창살 셔터에 온몸을 묶고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소식을 듣고 투쟁현장에 달려온 대학생들은 ‘어머니, 우리가 싸울테니 내려오세요’라고 눈물로 호소했으나, 이들은 농협중앙회장 면담 전에는 죽어도 못 내려간다면서 8시간을 완강히 버텼다. 결국 생명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사회단체 어르신들이 와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이렇듯 여성농민들의 투쟁은 2005년에는 혈서쓰기로, 2009년엔 삭발농성으로 확대되었다.

2009년 10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쌀값폭락 해결과 대북쌀지원 법제화 촉구를 위한 전국여성농민대표자대회'에서 삭발을 단행하고 있는 여성농민 대표자들(왼쪽)과 같은해 9월 전북도청 앞에서 열린 ‘쌀값대란 해결과 전북도 농정 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혈서로 쓴 현수막을 앞에 두고 삭발하고 있는 여성농민들.
2009년 10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쌀값폭락 해결과 대북쌀지원 법제화 촉구를 위한 전국여성농민대표자대회'에서 삭발을 단행하고 있는 여성농민 대표자들.

눈물의 삭발식, 딸자식 결혼이 한 달 뒤이건만…

여성농민들의 쌀 투쟁 중 두 번째 변곡점은 2009년 9월 23일부터 시작돼 10월 22일 대대적으로 확산된 여성농민들의 삭발투쟁이다. 여성농민 전국투쟁 이전에 전북에서는 오은미 도의원이 쌀값보장을 요구하며 15일째 단식투쟁을 감행하였고 이에 동참한 전북여성농민회의 간부가 삭발투쟁에 돌입했다.

이후 10월 22일 ‘쌀값폭락 해결과 대북 쌀 지원 법제화’를 촉구하는 전국여성농민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여성농민들은 눈물의 삭발식을 거행하고 비닐 천막농성에 돌입하였다.

여성농민들이 삭발투쟁에 나선 것은 쌀 투쟁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6월 20일 한-칠레 FTA 비준반대 투쟁 때도 여성농민들의 삭발투쟁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녀들은 삭발을 감행했을까?

처음 여성농민들이 삭발에 나설 때 심지어 농민회조차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을 만큼 우리 농촌은 보수적이다. 그런 보수적인 농촌의 정서를 잘 아는 여성농민들이 왜 삭발투쟁을 했을까? MB정부는 노무현정부 이후 대북 화해 기운을 차단하고 쌀의 대북지원 역시 봉쇄하였다. 또한 쌀값은 폭락할 대로 폭락하였고 농민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삶이었다.

10월 22일 삭발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한 제주여성농민의 인터넷 카페 글은 여성농민들의 자매애와 투쟁을 통해서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2009년 10월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열린 ‘쌀값폭락 해결과 대북쌀지원 법제화 촉구를 위한 전국여성농민대표자대회'에서 삭발을 단행하고 있는 여성농민 대표자들(왼쪽)과 같은해 9월 전북도청 앞에서 열린 ‘쌀값대란 해결과 전북도 농정 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혈서로 쓴 현수막을 앞에 두고 삭발하고 있는 여성농민들.
2009년 9월 전북도청 앞에서 열린 ‘쌀값대란 해결과 전북도 농정 개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혈서로 쓴 현수막을 앞에 두고 삭발하고 있는 여성농민들.

제주여성농민 000씨의 글

제주는 쌀 농사가 없어서 쌀 투쟁이 가슴으로 피부로 느끼는 절박함이나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 여성농민들이 결의와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 제주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서울로 합류했다. … 삭발의식 진행이다. … 그래도 여성이고 어머니인데, 자제분의 결혼을 앞두셨다는 김경순 회장님을 비롯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도 삭발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대회 내내 감동과 슬픔, 자랑스러움과 미안함 등 많은 감정이 교차됐다.

왜 눈물의 삭발이었을까? 여성농민대표자 6명은 삭발이 아니라 가슴에 쌓인 한과 응어리 때문에 눈물이 난 것이고, 100명이 넘는 참가들도 이러한 결기에 함께 눈물이 난 것이다. 삭발과 함께 비닐천막 농성장을 지킨 여성농민들은 한나라당 항의 방문, 1인 시위, 선전전, 지역별로 릴레이 농성투쟁을 통해서 투쟁을 이어갔고 11월 17일 전국농민대회까지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여성농민들의 이런 투쟁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쌀 투쟁에 대한 대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삭발투쟁에 참여했던 김성자 회장(전남연합)은 “여성에게는 정말 목숨처럼 소중한 머리카락을, 우리 농업을 위해 오늘 이 서울 한복판에 기꺼이 내놓고 가겠다. 여성농민들의 삭발이 이 정권으로부터 우리 농업을 지켜내는 길에 불을 댕기는 도화선이 되리라 믿는다”며 결의를 다졌다. 쌀을 지켜내기 위해 밥을 굶고 삭발을 하고 혈서를 썼던 여성농민들, 그들에게 쌀은 생명줄이고 애국이고 통일이다.

모든 자리에 있었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농민에 주목합니다. 새해를 맞아 ‘오미란의 한국여성농민운동사’를 월 1회 연재합니다. 오미란 젠더 & 공동체 대표가 시간을 되짚으며 풀어내는 여성농민운동의 역사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셨나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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