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다방 DJ⑤ 그들도 한때 팬을 몰고 다녔다

  • 입력 2019.06.09 19:13
  • 수정 2019.06.09 19:1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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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0년 겨울 어느 날, 강원도 원주의 버스터미널 인근에 ‘지구음악다실’이 문을 열었다. 디스크자키 김동욱이 ‘뮤직박스’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턴테이블에 레코드를 얹은 다음, 신중하게 바늘을 올려놓는다. 폴 모리아 악단의 유명한 연주곡인 ‘이사도라’가 잔잔하게 실내에 울려 퍼진다.

-안녕하십니까? 저희 지구음악다실을 찾아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지구음악다실의 뮤직페스티벌 제1부 진행을 맡은 디스코 자키 김동욱입니다. 오늘은 비틀즈 특집으로 꾸며 드리겠습니다. 첫 곡으로 ‘레이디 마돈나’를 감상하신 다음에….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달랐겠지만, 대부분의 음악다방 디스크자키들은 뮤직박스에 들어가서 진행을 시작할 때 미리 정해둔 시그널 음악을 흘려보내거든요. 저는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한 ‘이사도라(Isadora)’를 시그널로 썼어요. 그리고 단순히 다방에 찾아온 손님들이 신청한 노래만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그 날 진행을 특색 있게 하기 위해서 나름으로 사전에 계획을 세우지요. 이를테면 오늘은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틀즈의 노래를 집중적으로 감상하게 하자, 이런 방식으로….”

왕년의 다방 DJ 김동욱 씨의 얘기에 따르면, 음악을 신청하는 사람들의 취향도 매우 다양했다. 보통은 차 심부름을 하는 레지에게 메모지를 청해서 신청곡을 적어내지만, 더러는 직접 뮤직박스에까지 걸어와서 신청곡 용지를 들이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알록달록한 꽃무늬 종이에다 집에서 미리 희망곡을 적어가지고 온 여자 손님도 있었고, 다방에 비치된 용지가 아닌 담배 은박지나 과자봉지에다 곡목을 써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뮤직박스의 뚫린 구멍으로 과자와 담배가 함께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거나한 취기를 달고 다방에 들어와서는 뮤직박스의 유리를 꽝꽝 치면서 다짜고짜로 “야야, 다 때려치우고 최희준의 ‘하숙생’ 틀어!”, 그렇게 욱대기는 남정네도 있었다.

“달랑 신청곡만 적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함께 적어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간지러운 얘기지만, 오늘따라 디제이 아저씨의 빨간 넥타이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뭐 이런 문구를…. 그걸 또 마이크에 대고 읽어주면서 나도 덩달아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랬다니까요, 허허허. 하지만 일주일 전에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냈다면서 한용운의 시구를 옮겨 적은 손님이나, 실연당한 사연을 메모지 뒷면에까지 길게 적어 내리고는, 자신이 신청한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 흘러나오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그런 사연을 대하면 숙연해지기도 했지요.”

그만그만한 나이에 가족을 잃거나 연인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은 심사야 남녀가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 타고난 속성상 대폿집에 찾아가 소주라도 진탕 들이켜고 나서 한바탕 고함을 내지르거나, 길가 전봇대에다 빈 주먹질이라도 하면 했지, 음악다방에 찾아가서 그런저런 사연을 쪽지에 적어서 디제이에게 들이미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보면 당시의 디스크자키는, 다방을 찾은 젊은 여성들이 음악을 매개 삼아서, 개인적인 아픔과 고뇌와 그리움과 투정까지를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그런 만만하고도 이물 없는 대상이기도 했다.

물론 한편으론 음악다방의 디스크자키와 젊은 여자 손님들은,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과 팬’의 성격을 지녔다 할 만하다.

“군밤이나 군고구마를 뮤직박스에 넣어 주는 아가씨도 있었고,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DJ의 얼굴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꼭 그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노래를 신청하는 여자 손님도 있었어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여자 분들은 디스크자키 보러 오는 것 아니겠어요? 변두리 다방의 남자 손님들이 예쁜 레지 얼굴을 보려고 출근하다시피 했던 것처럼…. 이건 좀, 비유가 그런가요?”

흐음, 그건 좀, 비유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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