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극한직업

  • 입력 2019.06.02 20:27
  • 기자명 송인숙 (강원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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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숙(강원 강릉)
송인숙(강원 강릉)

얼마 전에 극한직업이라는 영화를 봤다. 많이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의 직업 농촌의 아낙, 이보다 더한 극한 직업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3년 귀농을 했을 때 다섯 살, 넉 달 된 두 아이가 있었다. 처음 일 년은 시골 가서 아이만 키우면 된다는 남편의 말처럼 나는 아이 둘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종닭을 키우던 남편은 방목으로 정성껏 키운 닭을 팔려고 했으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사겠다는 상인의 말에 화를 냈다. 상인은 사료값만 더 들어갈 텐데 하면서 자리를 떴고 남편은 상인에게 닭을 넘기지 말고 삶아서 팔자고 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돌 된 작은아이를 업고 백숙집을 시작하게 됐다.

1994년 하늘이 도왔는지 갑자기 찾아온 무더위에 닭값이 올랐다. 고생은 됐지만 우리는 직거래로 판매를 하면서 사료값도 갚고 조금의 목돈도 만지게 됐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자 아이 둘만 키우면 된다던 남편의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편은 내가 일을 더 하기를 바랬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면서 나는 남편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 밥을 하고 아이들을 챙겨서 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남편과 같이 밭으로 간다. 어떤 날은 아침을 먹자마자 밭으로 가게 돼 점심에 집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준비하면서 아침에 못했던 설거지를 했다.

점심밥을 먹자마자 다시 밭으로 가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서 저녁을 준비한다.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점심 설거지와 저녁 준비 그리고 빨래와 청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쁘게 움직였던 나는 피곤함에 지쳐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면서 쓰러져 잠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청소기를 돌리며 집안을 청소한 적도 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집 근처까지 오는 시내버스가 없었다. 매일 버스가 오는 지역까지 아이들을 데려다 주기 위해 운전을 했다. 어느 날엔 중학교에 다니는 큰아이를 보내고 다시 와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작은아이를 챙길 시간이 부족했다. 그럴 땐 남편을 깨워서 큰아이 등교를 부탁했다.

우리나라의 최고로 극한직업은 농촌의 아낙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면서도 내 딸 만큼은 시키고 싶지 않은 직업이다. 여성들이 시골로 결혼을 오지 않으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농사짓는 유일한 마지막 시골 아낙이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안 경제의 중심에 있는 난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고자 한다. 요즘 농기계 임대사업으로 빌려주는 농기계가 많아졌다. 도시의 주부들처럼 최신은 아니어도 시골 아낙들에게 가전제품의 지원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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