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헌의 통일농업] 대북 ‘인도적 지원’ 논란, 지혜롭지 못하다
[이태헌의 통일농업] 대북 ‘인도적 지원’ 논란, 지혜롭지 못하다
  • 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 승인 2019.06.02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이태헌((사)통일농수산사업단 이사)

하노이 북미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북한이 국제사회에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즉각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 북한은 우리에게 “생색내기보다는 ‘근본적인 문제’에 나서 줄 것”을 강조하면서 이에 호응하지 않았지만 정부의 지원방침은 흔들림이 없는 듯하다.

대북 인도적 식량지원 방침이 시의 적절하게 확정되기까지는 유엔(UN)의 요청과 함께 ‘제재 예외조항’이라는 해석이 뒷받침됐다. 이와 관련 지난 13일 세계식량계획(WFP)의 데이비드 비슬리 사무총장이 방한, 청와대를 예방하고 통일부장관과 면담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역시 한국 정부의 식량지원 방침에 동의, 한몫을 거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중국과 러시아가 예상대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키로 했으며, 유럽연합(EU)도 “식량지원은 제재 예외조항”이라며 함께 나서기로 했다.

이번 대북 식량지원 방침은 원칙적으로 인도주의와 동포애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취임 첫 기자회견에서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배고픈 아이는 (정작) 정치를 모른다”며 이번 식량지원이 인도적 차원이라는 원칙을 재차 밝혔다. 통일부는 이와 관련 ‘정치적 문제와 인도적 사안을 분리’하고,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면서 ‘시기, 규모, 방식을 고려해 국제기구와 함께 지원’할 방침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당시 에티오피아를 철권통치하던 멩기투스 사회주의 정권이 반군 지역에 식량과 의료 지원을 막아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게 했던 상황이라 에티오피아에 식량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크게 반대하는 국내 여론에 직면했다. 레이건 정부는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레이건 정부는 ‘팍스 아메리카’라는 패권적 국제정치를 강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 가치와 규범’을 존중한 사례를 남겼다.

반면, 대북 ‘인도적 식량지원’을 둘러싼 최근의 국내 논란은 품격을 잃고 있다. 일부 보수언론은 최근 북한이 제재완화를 노리고 국제사회에 식량부족이라는 자작극을 벌이고 있다는 극단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또 일부 정치권에서는 미국이 반대한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이는 대부분 근거가 빈약한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여기엔 대북 지원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호전될 경우 어쩌면 정치적 이슈와 지형이 크게 바뀔지 모른다는 셈법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과 식량농업기구(FAO), 그리고 유니세프는 북한의 식량사정에 매우 밝다. 그들은 이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그룹을 평양에 상주시켜 왔으며, 오랜 기간 동안 다중지표군조사(MICS)란 조사방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북한의 식량보건 실태를 추적, 모니터링해 왔다. 유니세프와 스위스국제개발청(SDC)은 이와 관련 북한 현지에서 지원물자가 분배되는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우리 국민들은 대북 식량지원을 계기로 막혔던 대화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는 속내가 있을지 모르겠다. 혹은 우리 정부가 주도하는 국면으로 북한 당국을 이끌어 낼 ‘당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을 수 있겠다. 농업계에서는 식량지원을 통해 재고량이 과다한 국내 쌀을 북한으로 보내고 싶을 것이다. 현재 쌀은 가공용과 주정용, 그리고 사료용으로 특수처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60만 톤에 달하는 재고량이 쌓여 있다. 농민들은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이라 이 같은 처분보다는 차라리 북녘의 동포에게 나눠주는 것이 덜 속상할 법도 하다.

한국은 지난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24번째 국가로 가입했다. 원조를 받았던 국가가 최초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거듭났다는 사실 때문에 국제사회의 큰 주목을 받았다. 우리 스스로도 ‘그동안의 빚을 갚을 수 있게 됐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라는 전담기구를 통해 지난 2018년에는 약 2조7,000억원을 해외에 원조했다. 세계 15번째에 해당하는 원조규모이다. 지난 1월 32차 국제개발협력위원회에서는 이낙연 총리가 “올해는 3조2,000억원 규모로 공적개발자금(ODA)이 확대됐고, 민간이 16%에 달하는 5,000억원 이상을 담당하는 시대를 맞았다”며 해외원조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미 국제사회의 본보기 국가로 성장했다.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질적인 성장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국격과 한국민의 품격이 모범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북한에 대해서만 혼란과 서운함, 지나친 경쟁적 자부심이 혼재하는 이중성이 짙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인도적 지원이 정치적 영향력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을 부정할 수 없겠다. 그렇다고 너무나 뻔한 일이라며 ‘외교적 수단’이나 ‘정쟁의 도구’로 삼는 일에 동의할 수는 없다. 이런 이중성에 무감각해지는 것조차 더 이상 인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 간에는 분단과 대결의 골이 깊었기 때문에 ‘인도적 가치’야 말로 소멸되지 않은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식량지원에는 지혜로운 대처가 중요하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국민의 품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할 일이다. 원조를 제공하는 측의 ‘갑질’도 경계할 일이다. 식량지원을 통해 북한에 대해 ‘입막음’을 강요하거나 대가를 전제하는 ‘당근’이 돼선 곤란하다. 우리가 먼저 인도적 가치와 규범에 충실할 때만이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고, 비로소 ‘대화의 물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