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1] 대항쟁의 전야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6.02 18:22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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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근대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인 기미년이 밝았다. 소위 민족자결주의라는 것이 실은 우리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식민지를 포함한 세계의 평화를 논의하는 자리같았지만 실상은 서구 제국주의 간에 영토를 재분할하려는 회의임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그는 나름대로 맹렬한 활동을 벌였지만 어떤 호응도 받을 수 없었다. 1907년에 헤이그에 파견된 밀사들과 같은 신세였다. 그도 그럴것이 1차 대전 전승국 27개 나라 70여 명의 대표 중에는 일본도 어엿한 전승국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친왕 이은과 부인 방자.
영친왕 이은과 부인 방자.

파리에서 한창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던 때, 일제는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면서 영친왕이라고 불렸던 이은을 일본 여인 방자와 결혼시키려 1월 25일로 날짜까지 잡았다. 그리고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택하여 유람을 보내기로 한다. 세계에 조선과 일본이 하나로 동화되었음을 알리려는 술책으로서의 결혼이었다. 그런데 이 결혼은 예기치 못한 사태로 연기되는데, 왕위에서 쫓겨나 앙앙불락하던 고종이 갑자기 죽은 것이었다. 고종은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뇌일혈, 혹은 심장마비였다. 일제는 영친왕의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고종의 부음을 즉각 알리지 않고 이틀이나 숨겼다. 나흘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 때문에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의 그런 태도가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물론 대항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의도적으로 독살설을 퍼뜨리기도 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고종의 부음을 들은 백성들 수십만이 대궐로 몰려들어 밤낮으로 통곡했다고 한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 또한 학교를 파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울부짖기를 오래도록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분히 독살설이 끼친 영향이었다. 억울하게 쫓겨나 유폐되었던 옛 왕이 결국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엄청난 분노와 울분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독살설은 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고종이 독살되었을까.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 서울로 오는 사람들.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 서울로 오는 사람들.

고종의 독살에 대한 내용은 이듬해인 1920년에 쓰인 윤치호 일기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식혜를 마신 지 30분만에 경련을 일으켰다거나, 불과 며칠 사이에 시신의 팔다리가 부풀어올랐다던가, 치아가 모두 빠져있었다던가 등등의 내용이 당시 염을 했던 사람을 통해 퍼져나갔다고 윤치호는 썼다. 요컨대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입과 입을 거치며 퍼져나간 것이었다.

오히려 일제로서는 고종이 죽는다면 그들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영친왕과 일본 왕실 여인 방자와의 결혼은 일제가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고종의 죽음으로 무산되거나 연기되는 것을 원할 리 없었다. 그리고 당시 궁의 의사들이 남긴 기록에도 고종은 불면증과 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결코 일본 왕실과 사돈을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떡하든 결혼을 무산시키려 애쓰고 있었고 그게 여의치 않자 잠을 자지 못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뇌일혈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합리적이다. 평소에 건강한 편이었다 해도 고종은 이미 67세의, 당시로서는 고령이었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고종 독살설은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함께 3.1민족대항쟁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강화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을 전한 신문 기사 중에는 ‘국가 간에 분쟁이 생길 경우에 강제로 점령하는 나라는 오히려 불리해질 것이다’라는 대목도 있었는데, 이 같은 내용은 당시 민인들에게 엄청난 기대와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진짜 내용은 서로 무력으로 싸우지 말고 협상으로 식민지를 나누자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여튼 3월 3일로 정해진 고종의 장례식과 속속 들려오는 파리강화회의 소식들이 식민지 반도를 뜨겁게 달구어 갔다. 나라를 잃은 망국의 왕이 죽음으로 민인들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고종이 남긴 가장 큰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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