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해방공간 한 선교사의 ‘영천 일기’③

  • 입력 2019.06.02 18:18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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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물론 대구 항쟁과 영천 항쟁은 그 성격에 있어서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대구가 ‘식량투쟁’이었다면 영천에서는 ‘공출거부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미군정과 경찰은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해서 참담하게 보복해버렸다. 대구에서 온 무세 주교의 전언에 따라 루이 델랑드는 폭동의 목적이 ‘경찰들과 민간 당국 제거, 종교에 대한 공격, 부유층 제거’라는 네 가지 이유를 일기에 남겨놓았다. 내가 아는 한 항쟁을 일으킨 민중들은 보리공출 과정에서 잔혹한 만행을 저지른 친일경찰과 군수를 암살하고 악덕지주에게 분풀이는 했을망정 미군들을 위협하거나 종교에 대한 공격은 전혀 없었다. 1934년부터 농촌 사람들과 함께 영천을 살아낸 사제로서의 그의 인식은 의외였다. 공출 과정에서 일제 앞잡이였던 경찰들이 해방된 나라에서 더 잔혹한 방법으로 보리를 뺏어갔다. 그렇게 당한 소작농민들의 처지를 그는 정녕 몰랐던 것일까?

성직자로서 빈민구제를 위한 일이라면 루이 델랑드는 대단히 전투적이었다고 나는 이미 말한바 있다. 고아들과 장애인들에게 먹일 쌀 한 톨이라도 더 얻으려고 미군정과 영천군청을 상대로 신경전을 펼치는 그의 행동은 집요했다. 밥 한 그릇 때문에 사투를 벌이던 해방공간 저잣거리 장삼이사들의 아귀다툼과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그의 고군분투는 눈물겨울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해방공간 일기만 반복해 읽어보았다. 그 이유는 사제로서 델랑드가 간직했던 종교철학이 아니라, 인간 델랑드의 삶의 철학을 엿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영천을 떠나 포항에서 쓴(1950년 6월) 편지 한 부분을 읽어보자.

“오랜 압박을 겪은 뒤에는 흔히들 다시 찾은 자유를 이내 실감하지 못하곤 합니다. 36년 동안 지속된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있던 일본인들은 신분상의 가혹한 응징을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반대로 동포들 사이에 나쁜 본능이 이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불행이도 미국인들이 늦게 와서-하기는 그들이 무질서한 자유와 이 나라에 적합하지 않은 정치를 들여오기는 했지만-내란을 별로 억제하지도 지연시키지도 못했습니다. 1946년 10월 3일 갑자기 내란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일본 압제의 관행을 마지막까지 옹호하였고 많은 재산의 소유자였던 그 당시 경찰이 첫 번째 주된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항상 그런 것과 같이 여기서도, 미군 도움을 받은 응징세력이 이겼고 그들 또한 적어도 폭도들만큼 잔인한 행위를 했습니다. 사실상 ‘빨갱이’라고 평판 난 작은 읍내에서 저는 암살과 보복이 난무하는 비극적인 시간을 겪었습니다.”

사족 하나. 영천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삼덕당(三德堂)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여섯 명의 처녀가 동정을 지키며 살 것을 서약한 초가집이 있었다. 신(信), 망(望), 애(愛)를 가리키는 삼덕당은 ‘예수성심시녀회’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역시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루이 델랑드는 1930년대에 이미 화산면 용평본당에 무료진료소를 개설하고 양로원과 보육원까지 운영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성모자애원 전신이다.

루이 델랑드는 화산면 용평본당에서 7년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1940년 영천성당으로 옮겨와서 해방을 맞고 아비규환의 해방공간 영천읍내 상황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1941년 영천경찰서에서는 동정녀들을 몇 달간 투옥시켜 고문한 뒤, ‘외국인 간첩’으로 몰아 델랑드 신부까지 구금시킨 일도 있었다. 카타하마와 조선인 순사 김제하 무리들이 벌인 짓거리였다.
 

이중기의 ‘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은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연재를 중단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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