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0] 상해, 독립운동의 요람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0] 상해, 독립운동의 요람
  • 최용탁 소설가
  • 승인 2019.05.26 2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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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제20회>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면 단위까지 세밀하게 조직된 행정체계는 이전에 없던 것이었고 헌병과 순사보 등으로 이루어진 경찰력 또한 물샐 틈이 없었다. 총칼로 다스린다는 말 그대로 무단통치 하에서 한 번 저들에게 찍힌 사람은 일상생활조차 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국외로 망명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 중에서도 중국의 상해가 초기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 모습.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 모습.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압록강 철교를 건너 머나먼 상해로 모여들었다. 1911년에 세워진 압록강 철교는 신의주와 단동을 연결하였고 중국과 일본이 절반씩 비용을 대었다. 앞으로도 무수한 투사들이 이 철교를 건널 참이었다. 3.1 민족 대항쟁을 앞둔 1918년, 상해에서는 국제정세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는 한편 한껏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바야흐로 국제정세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세계 경제를 주도했던 영국이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국고를 탕진한 영국과 달리 미국은 전쟁에서 비켜서 있으며 크게 시장을 확대한 것이었다. 미국의 부상과 함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러시아혁명이었다. 혁명을 이끈 레닌은 처음부터 식민지에 놓인 약소민족의 해방을 주장했다. 한편 일본은 유럽이 아시아에서 눈을 뗀 사이에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노골적으로 추진했다. 연합국에 편승한 일본은 독일이 지배하고 있던 남양군도와 산동반도 일대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하였다.

이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고무시킨 것은 소위 ‘민족자결주의’였다. 어느 민족이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의미였는데 그것이 또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최초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과거 제정러시아에게 압박을 받던 약소민족들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면서 그것이 전체 피압박 민족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레닌의 주장이 나오고 3개월 뒤에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역시 민족자결주의를 들고 나왔다. 우리가 배운 민족자결주의는 바로 이 윌슨의 것인데, 실은 레닌이 먼저 주창한 것이었다.

같은 이름의 두 가지 민족자결주의는 내용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 것이 식민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라 생각했고, 윌슨은 뒤늦게 뛰어든 제국주의 전략 상 각 민족이 이전의 식민지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즉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도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두 나라가 하나의 용어로 정반대의 주장을 편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몽양 여운형.
상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몽양 여운형.

그래도 국제무대에서 약소민족, 식민지 문제가 크게 거론된다는 사실 자체가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고무시키는 일이었다. 아직 제국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여운형 정도였을 뿐, 여타의 민족주의자들은 금세 식민지가 종식될 거라는 환상에 젖는 정도였다. 하여튼 러시아와 미국에서 발신된 민족자결주의는 상해의 독립운동에 큰 전기를 마련했고 이것이 곧 3.1대항쟁으로 이어진다.

여운형과 김규식 등은 윌슨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919년 1월에 예정된 회의에 참가하여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을 호소하기로 하고 각국에 전달할 독립청원서도 작성되었다. 파리로 갈 사람들의 여비 마련을 위해 조직적으로 국내외에서 모금활동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며 독립의 기운이 높아져 갔다. 기독교와 천도교, 일본 유학생, 그리고 미주의 동포들까지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각지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3.1대항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중심은 상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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