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봄날의 짧은 사색

  • 입력 2019.05.26 18:00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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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가두어 놓은 논물에 산그늘이 내려앉는 계절입니다. 이미 모를 심은 논에도, 또 아직 모심기를 준비하는 논에도 살랑살랑 이는 봄바람에 산 그림자가 일렁이면 내 마음도 물결 따라 일렁입니다. 초록빛 산 그림자를 바라보며 짧은 사색에 빠져보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골살이의 낭만이겠지요. 때 아닌 사치를 부리는 것도 잠시, 돌아서면 일이고 돌아서면 일입니다.

결단코 늦은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달래는데도 이미 일을 마쳐가는 마을 분들과 비교할라치면 마음이 바빠집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축소된 농사 규모와 우리집 농사는 애당초 비교의 대상이 못 되는 것임에도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이 역시나 사람은 사회적 존재임에 틀림이 없나 봅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농사 규모를 줄인 분들이 느긋하게 농사일을 하느냐? 그것은 아닌 듯합니다. 좁은 농로를 3단 기어를 넣고 달리는 경운기와 논밭으로 가는 잰걸음이 말해줍니다. 평생을 전쟁 같은 농사철을 보낸 분들에게 농사철은 여전히 전쟁처럼 다가오나 봅니다. 

그런 농민들에게 농업발전은 어떤 의미일까요? 첨단 농기계 도입에 수월해진 농사일로? 아니면 고투입 농사가 가져다주는 고품질 농산물로? 아마도 그렇겠지요. 대부분 기술적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농산물 가격 결정이 도매시장과 무역 기구에 맡겨져 있는 것은 여전하고, 농업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주요 단위 사람들의 몫으로 여겨집니다.

엄밀히 말해 농업발전은 농민들의 지위와 상관없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시정잡배들더러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했던가요? 아마도 농민들에게 정책은 멀고 농사일만 가깝다고 말하는 것과 비스무리 할 것 같습니다. 단 개별 농민에게 말입니다. 

개별 농민이 정책에 다가서기란 쉽지 않습니다. 개별의 요구를 정책화하는 것도, 또 정책의 흐름도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더군다나 여성농민에게는 더 한 일이겠지요? 신문 한 줄 읽을 여유도 없는 농사일정 속에서 정치인들이나 행정가들에게 로비나 압력행사를 할 꿈이라도 꿔볼 수 있던가요? 이른바 ‘세상맹’인 양 농사일과 집안일에 파묻혀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 여성농민단체 창립식 날,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비슷비슷한 여성농민들이 모였을 뿐인데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입니다. 물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단체의 성격상 발언자들이 신경이 많이 쓰였을 것입니만 단상에 선 기관단체장이나 정치인들의 말이 달랐던 것입니다.

올해 농번기 일손 돕기에 얼마를 지원한다, 여성농민 바우처 지원을 높이도록 하겠다, 농민 월급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젠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등 일관되게 정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참여한 여성농민들의 눈빛도 달랐습니다.

평소 기관단체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들을 것도 없다고 말해왔는데 이날의 청중들은 눈과 귀를 한곳에 모아서 발언자들의 말을 새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별과 집단 간에 단번에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행사 후에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날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두고두고 되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집단적 움직임으로 인한 지위의 변화를 서로 느낀 것 일 테지요.

첨단농업의 시대에도 변화의 핵심은 농민의 지위이고 그것을 끌어내는 것은 결국 농민 스스로의 힘에 달려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 한 축이 여성농민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산 그림자가 내린 논길을 잰걸음으로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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