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9]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라고?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5.19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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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조선 말기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최초의 신자들이 보인 열광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외래 종교에 대해 그토록 빠르게 심취하고 거리낌 없이 순교를 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가장 비근한 설명은 기독교가 내세운 평등 이념에 있다는 것이다. 상하귀천이 없고 신 앞에서 남녀노소가 평등하다는 복음은 모든 봉건의식을 깨는 우레 소리나 다름없었다. 기나긴 억압에서 풀려나는 정신적 해방감을 맛본 이들은 결코 다시 족쇄를 찬 삶을 살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말 그대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사는 길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불과 100여 년이 지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이, 어느 선언의 첫머리와 같이 유령처럼 식민지 땅에 들어왔다.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이념이었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데서 나아가 일하는 사람, 노동자 농민을 사회의 주인으로 호명한 것이다. 이 놀랍고도 가슴 뛰는 생각이 들어온 계기는 물론 러시아 혁명이었다. 하나의 이념, 하나의 세계관이 거대한 나라를 전변시켰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 없는 20세기 최고의 사건이었다. 식민지 해방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개안이었다. 도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사회주의는 강력한 것이었다. 민인을 중시하는 맹자 유교를 깊이 이해했던 당대 지식인들 중 일부는 이 도발적 사상을 급격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서 최초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사회주의 정당이 탄생했으니, 이름하여 ‘한인사회당’이었다. 물론 국내에서 조직된 정당은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 이듬해인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등이 창당한 한인사회당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동휘는 누구였던가.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실로 파란만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1873년에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그는 지금의 사관학교 격인 한성무관학교를 수학하고 강화도를 지키는 진위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강화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다가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또 3년간 유배되었다. 1912년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한 그는 김립, 계봉우 등과 더불어 광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주의 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북간도 전역에 기독교 선교사업을 진흥시키기도 하였다. 이듬해에 러시아제국으로 망명하여 거점을 옮긴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에 가담하여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왼쪽)와 최초의 한인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리아.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왼쪽)와
최초의 한인 여성 사회주의자 김알렉산드리아.

그가 사회주의를 만나게 된 계기는 특별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이동휘는 뜻밖에 밀정으로 오인되어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고 만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그를 구원해 준 사람이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라 할 수 있는 김알렉산드리아였다. 당시 사회민주노동당 하바롭스크 책임비서이자 원동 소비에트 외교부장이던 열혈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리아를 만난 이후 이동휘는 민족해방운동에 사회주의를 접목시키기 시작한다. 한인사회당을 만든 이후에 연해주에 한인 적위군을 조직하는 등 그는 급격하게 사회주의에 경도해갔다. 요컨대 해방의 이념인 사회주의야말로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상당한 신망을 받는 인물이었다.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가 서자 그는 대한민국 임정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고,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 사회주의운동 확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민족해방의 이념을 두고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주장하였고 이승만은 구미식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념 문제는 이미 상해 임정에서 두 최고 지도자의 대립으로 시작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이동휘는 임정을 탈퇴하고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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