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농경사회 사람들] 해방공간 한 선교사의 ‘영천 일기’②

  • 입력 2019.05.19 17:57
  • 기자명 이중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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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기 시인

1946년 10월 1일, 대구는 거대한 불꽃을 쏘아 올렸다. 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영천은 3일 새벽 한 시에 터졌다. 인구 15만 중에서 6만 명 이상이 대열에 합류했다. 군청과 경찰서를 시작으로 우편국, 등기소, 신한공사가 불탔다. 친일경찰과 군수가 피살되고 모든 지서와 면소가 민중들 수중에 들어갔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해방 1945년은 풍년에다가 일본에 공출이 없어 쌀이 남아돌았고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시장제도’를 실시했다. 그런데 500만 섬 이상이 일본으로 밀수출되고 지주들이 곳간 빗장을 지르면서 국내에는 쌀이 절대 부족한 일이 벌어졌다. 패전국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미군정과 한민당의 묵인 아래 벌어진 밀수출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기 시작했다. 초근목피의 대재앙을 불러온 미군정은 일제도 하지 않았던 보리공출까지 너무 가혹하게 강행했고 그게 항쟁의 원인이었다. 영천은 회원이 3만 명이나 되었던 농민조합과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항쟁의 주역이었으나 이틀 뒤부터 엄청난 피의 보복을 당했다.

「선교 노트」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델랑드가 1947년 3월 5일 동료 신부에게 보낸 편지 한 부분을 보면, 10월 항쟁 관련 재판이 대부분 영천에서 진행되었고, 거기에는 델랑드가 깊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곳에서 심각한 민중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여 명의 경찰관이 암살된 데 대한 처벌로 40여 명의 사람이 재판도 받지 않고 학살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미국인들이 개입해서 재판이 행해졌으며, 저는 다섯 달 동안 바로 그 미국인 재판관들에게 숙소를 제공했습니다.”

영천 현지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이 증언은 놀랍다. 모든 재판이 대구로 이첩되었다는 기존 증언을 뒤엎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다. 또 그는 그해 8월 10일 한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0월 민중폭동 때에 양 진영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제가 대담하게 감옥에 침투해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런 발언을 뒷받침하는 증언들은 「선교 노트」곳곳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루이 델랑드는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어떤 상황에 대해 세세하게 밝히지 않아 읽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는 일기에서 영천의 좌우 대립과 갈등에 대해 거의 대부분 그냥 한 마디 툭 던져놓기만 할뿐, 사건 이후에 대한 서술은 아예 생략해버린다.

10월 항쟁에 관한 한 루이 델랑드는 철저하게 방관자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온당한 입장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만, 영천으로 흘러드는 헐벗은 천둥벌거숭이 빈민들을 구제하는 일에 철저했던 성직자로서 일기 전편을 관통하는 델랑드의 인류애야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어느 한편의 민중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칼끝처럼 비정하다.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그의 문장은 그래서 ‘영천 10월 항쟁’을 바라본 우익의 눈빛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철저하게 당시 미군정 장교들과 같은 시선으로 어느 한쪽의 민중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46년 10월 7일 일기는 한민당과 미군정의 판단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오전에 무세 주교님과 카다르 신부님이 우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특별 허가증을 지참하여 트럭을 타고 오셨다. 내 권유로 우리는 뤼카 신부님을 데리고 와서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 격렬한 투쟁이 벌어졌던 대구의 소식을 들었다. 이번 대구 사태의 목적이 네 가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들과 민간 당국 제거, 종교에 대한 공격, 부유층 제거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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