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18] 어느 의형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농민소설가 최용탁님의 근대사 에세이를 1년에 걸쳐 매주 연재합니다. 갑오농민전쟁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근대사를 톺아보며 민족해방과 노농투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 입력 2019.05.12 18:0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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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중국에 큰 둥지를 틀었던 해외 독립운동은 멀리 미국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안창호와 이승만이 널리 알려진 이름이지만 미주운동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박용만이다. 박용만은 그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와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변절론, 의열단 문제 등으로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어려운 인물이다. 그러나 초기 미주운동에서 그를 빼놓을 수 없고 그가 가졌던 독립운동에 대한 사상과 실천은 우리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군대를 키운 박용만.
미국에서 군대를 키운 박용만.

박용만은 1881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한문에 능통했다고 한다. 15세에 관립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갔다가 활빈당 활동에 관여하여 첫 번째 옥살이를 한다. 귀국 후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두 번째 옥살이를 하는데 이 때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여섯 살 위의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는다. 역시 감옥을 살던 정순만과도 의형제를 맺어 세간에서는 이들을 삼만이라고 불렀다. 이후 잠시 평남의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데, 이 때의 제자 중 한 명이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이었다.

1904년에 유일한 등과 함께 미국으로 간 박용만은 군사력을 길러 독립을 해야한다는 노선을 견지하고 독립군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다. 다양한 역량을 갖고 있던 그는 전도사와 신문사 주필, 군사학교장 등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그는 둔전에 의거한 독립군 기지를 세우기 위해 미국뿐 아니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도 지속적으로 접촉하였다. 박용만의 무력 투쟁론은 우리 독립운동에서 가장 올바른 노선이었으나, 무력 투쟁을 배격하는 이승만이나 안창호와는 척을 질 수밖에 없었다. 안창호는 박용만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이해하는 편이었으나 이승만과는 말 그대로 원수가 되고 만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두 지도자는 의형제에서 최고의 정적이 된다. 박용만은 독립군부대를 창설한 후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니며 군대의 힘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하여 독립을 이루자고 감동적인 연설을 하곤 했다. 그의 독립전쟁론은 하와이 동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고 군대 창설을 위해 현재 금액으로 900만 불 이상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열악한 농장 노동자들이 대다수였던 동포사회에서 실로 눈물겨운 액수였다. 마침내 1914년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세워서 기세를 올렸다. 비행부대까지 양성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한인사관학교의 교관 및 생도들.
한인사관학교의 교관 및 생도들.

박용만의 군대 양성이 꺾이게 되는 것은 1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이었다. 우호적이었던 미국이 일본과 동맹국이 됨으로써 일본을 공격하려는 군대 훈련을 묵인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틈을 타서 이승만은 박용만 세력을 꺾기 위해 온갖 음모와 반대 책동을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박용만이 재판정에 섰을 때 증인으로 나와서 ‘미국 영토에 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고 위험한 배일활동을 하는 자’이며 일본 군함을 공격하여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해하였다. 결국 미국의 독립운동 주도권은 이승만에게 넘어갔고 박용만은 임시정부의 외교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이승만과는 함께 할 수 없다며 부임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끊임없이 분열 책동을 일으키고 조선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 두자는 소위 ‘위임통치안’을 들고 나와 공분을 일으켰다. 신채호는 격분하여 이승만을 을사오적보다 더한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능란한 언변과 처세술로 동포사회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특히 동포들이 걷은 독립자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등 뜻있는 동포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박용만은 생애 마지막에 만주에서 땅을 개간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자금을 마련하는 일에 몰두한다. 하지만 김원봉의 의열단에서 박용만을 암살하고 만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 일제에 매수된 변절자라는 이유였는데 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사의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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